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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휴머니즘
비오는 날의 휴머니즘
  • 이승우 / 도서출판 길
  • 승인 2004.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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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인의 편지

이승우 /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

9년여를 다닌 첫 출판사를 아무 대책 없이 그만두고 새로운 출판을 해보겠다고 결심을 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이곳저곳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출판사 대표들이 있었지만, 나는 좀더 새로운 출판을 해보고 싶었다. 엄혹해져만 가는 출판현실 속에서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인문, 학술출판의 본령을 세워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무슨 대형출판사를 꿈꾸는 건 아니다. 책 한권 한권이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지적 담론을 형성하고 생각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그런 출판사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만 그러할 뿐 내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아주 작은 출판사에 둥지를 틀고 새롭게 출판을 구상하며 현실화시키는 과정에서 나는 김유동 경상대 교수(독문학)와의 만남을 잊을 수 없다. 가깝게 지내던 선생님들과 다시 새로운 인사를 하고 새롭게 출판 일을 시작했다는 선언(?)을 했지만, 내심 불안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지리산 자락에서 손수 집을 짓고 사시던 김유동 교수와의 1박 2일 동안의 만남은 내게 인문, 학술 출판의 의미와 새로운 출발의 다짐을 견고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김 교수와 나는 우리 시대 인문학의 위기, 문화산업에서 아우라가 탈각된 모습, 그리고 지식인 사회의 위기, 출판문화의 지나친 상업화 등과 관련해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새벽녘에는 결의에 차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정통 인문, 학술 출판사를 만들어보겠노라고 건배하며 외쳤다. 그러나 다음날 김 교수가 직접 담근 매실주를 받아들고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이런 간밤의 다짐은 숙취와 함께 고단한 미래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다시 돌아온 서울은 기형도 시인이 쓴 '짧은 여행의 기록'이라는 산문의 마지막 부분처럼 나를 옥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현실만 탓하고 있을 수 없었다. 부지런히 필자들을 만나고 새로운 책 기획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교수를 만나 뵙고 온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던 그날은 비가 내렸고 종로3가를 풀이 죽은 채 걷고 있었다. 대형 기획안을 갖고 찾아뵈었던 어느 학자가 그 기획안에 대해 이런저런 이유로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해줬던 터라 그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대안에 골몰해 있었던 때였다. 문득 걸려온 핸드폰의 목소리는 바로 김 교수였다. 그는 안부를 묻고난 뒤, 새롭게 출판 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할 텐데 당신께서 1백만원을 내 통장에 입금시켰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하염없는 고마운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 액수, 그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꼭 훌륭한 인문, 학술 출판사를 만들어보라는 그 격려가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지금, 나는 4권의 책을 만들었다. 아직도 모든 것이 힘겹고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없지만 김 교수와 같은 분들이 내 주변을 지켜주면서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아 나는 오늘도 겁없이 인문, 학술 책을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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