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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0] 인류가 신이나 주인 없이 형제처럼 살 수 있다면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0] 인류가 신이나 주인 없이 형제처럼 살 수 있다면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4.12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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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엘리제 르클뤼③

 

 

반국가주의 내지 반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아나키스트들이 국제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므로 특히 지리학이라고 하는 학문의 성격이 아나키즘과 통할 수 있지만, 한국의 지리학이 아나키즘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나키즘의 최고 이론가인 크로포트킨이 지리학자인 것처럼 그의 친구인 지리학자 엘리제 르클뤼도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이다.

1893에 그는 농민들에게 땅을 점령하고 공동으로 일할 것을 촉구했다. 생산량을 늘리고 모두에게 삶의 수단을 제공하기 위해 첨단 기술을 추구한 그는 세기말에 프랑스의 아나키즘 집단에서 ‘신멜서스주의’가 부흥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리학 연구에 의해 모든 인류가 편안하게 살 수 있을 만큼 지구는 충분히 풍부하다고 확신했다. 더욱이 그것이 자연의 파괴적인 정복 없이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람들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으며 상호 원조는 그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라고 본 그는 “인류의 작은 그룹이든 큰 그룹이든, 그것은 항상 모든 발전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자발적인 연합과 협력을 통해,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인간 발전을 결정하는 세 가지 주요 법칙이 있다고 주장했다. 즉 계급 투쟁, 평형의 추구, 그리고 개인의 주권적 결정이다. 그 중에서 개인의 주도권이 가장 중요한 진전 요인이지만, 사회의 투쟁과 균형 사이에는 끊임없는 진동이 존재한다고 본 그는 아나키 상태 자연 질서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학문적 연구와 전투적 선동의 긴 생애를 보냈다.

동시에 역사적 발전에서 인종의 역할을 거부한 그는 모든 종족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며 그들의 외부적 차이는 전적으로 다른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융합을 옹호한 그는 다른 나라의 '유럽화'를 환영하며 상호 연관된 세계를 창조했지만, 이것은 제국주의의 위장된 형태가 아니라 당시 유럽의 기술적 진보와 사회적 자유를 인정한 것이었다. 크로포트킨처럼 르클뤼는 인간은 고립된 원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전체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1890년대 초 테러 캠페인이 실패하고 그에 따른 혁명 운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크로포트킨과 같이 르클뤼는 사회적 변화의 점진적이고 진화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되었다.

 

진화(evolution)과 혁명(revolution)의 조화

 

1892년에 『새로운 세계지리』의 마지막인 제19권이 발간되자 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브뤼셀 자유대학의 교수로 초청받았으나, 그 직후 파리에서 터진 폭탄사건에 그의 조카가 억울하게 연루된 탓에 그 초청은 취소되었다. 심지어 그 취소에 항의한 교수들도 해고되었다. 그러자 시민들에 의해 1894년에 브뤼셀신대학이 창립되어 르클뤼를 비교 지리학 의장으로 임명했다. 르클뤼는 1900년까지 브뤼셀에 살면서 지리학과 종교학을 강의하여 인기가 높았다. 그리고 식물학자 에르망스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진화와 혁명(Evolution et revolution)

 

1898년에 그의 『진화와 혁명, 아나키즘의 이념』이 간행되었다. 1880년에 팸플릿으로 낸 <「진화와 혁명(Evolution et revolution)」을 발전시킨 이 책은 그의 아나키즘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Evolution과 révolution은 지구의 공전(公轉, 한 천체가 다른 천체 주위를 원이나 타원 궤도를 따라 도는 것)과 혹성의 자전(自轉, 천체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운동)을 뜻하기도 한다. 진화를 긍정적으로 보는 르클뤼는 그 담당자를 우주, 지구, 자연, 인간, 동물, 식물로 보고, 인간의 진화와 사회의 진화를 함께 다루었다. 인간의 진화를 이루는 것은 혁명인데, 그것은 사회체제의 혁명만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으로 혁명이 진화에 의해 성취된다고 보았다. 즉 매일 논밭을 가꾸고 해와 달. 지후에 주목하면서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것, 지구와 함께 자전하면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 책의 마지막에서 르클뤼는 “와야 할 진화와 혁명은 이념 뒤에 오는 현실이고, 어떤 현상과 같은 현상을 섞는 것이다. 건전한 유기체에서 삶을 기능시키고 인류와 세계의 삶을 기능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진화는 이념이고 혁명은 현실이다. 머릿속으로 진화를 준비하고 스스로의 신체로 혁명을 낳는다는 것은 그 두 가지가 항상 동반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로부터 르클뤼는 프랑스의 모든 혁명이 진화 없는 혁명이라고 비판했다.

 

르클뤼의 마지막 단말마, “혁명이다!”

 

1904년에 형 엘리가 죽었다. 엘리도 신대학의 교수로 종교학을 가르쳤다. 뒤에 레비브륄이나 마르셀 모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엘리는 문화인류학 창시자의 한 사람이었다. 르클뤼가 이듬해에 죽은 것은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병석에 누운 탓이기도 했다. 그해에 『새로운 세계지리』의 영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번역본이 나왔고, 1905년 러시아혁명이 터졌다. 혁명 소식에 병석의 르클뤼가 “혁명이다!”라고 환호한 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만년의 르클뤼는 『대지와 인간(L’ Homme et la terre)』 6권을 집필했다. 그가 죽은 1905년에 제1권이 나오고 1908년에 마지막 권이 나왔다. 이 책은 인문지리학과 사회지리학의 선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에게 지리학은 인민 상호간의 변화하는 관계와 그 환경에 대한 연구였다. 인간 삶의 공간적 차원을 살펴보면서 그는 국가의 인위적인 경계에 의해 무시되는 사람들을 위한 자연 환경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사람들은 비슷한 생활 조건을 공유할 때 자연스럽게 협력한다고 본 그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이질적인 민족의 강압적이고 왜곡된 법적 통합을 표상했기 때문에 유럽 국가의 국가적 지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의 사회 철학의 중심은 진보다. 진화와 혁명이 모두 역사에서 일어난다고 믿으면서도 혁명적 대업의 궁극적인 성공을 확신한 그는. 마지막 권의 ‘진보’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대지와 인간(L’ Homme et la terre)

 

“우리를 둘러싼 대륙, 해양, 공중을 정리하는 것, ‘우리의 전원을 경작하는 것’, 식물, 동물, 인간 각각의 개체성을 양성하도록 새롭게 그 환경을 배치하고 주정하는 것, 지구 그 자체에 속하는 우리 인간의 연대를 확고하게 의식하는 것, 우리의 기원, 현재, 지금의 목적, 먼 이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에 의해 진보가 양성되는 것이다.”

 

비폭력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한 입장은?

 

그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그는 '신이나 주인이 없이 형제처럼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하곤 했다. 자연 보존을 옹호하고 동물에 대한 육식과 학대에 반대한 그는 현대의 사회생태주의와 동물 권리 운동의 선구자였다. 우리가 다른 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본 그는 “동물의 관습은 우리가 생명과학에 더 깊이 침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사랑을 넓힐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비폭력주의자인 톨스토이나 간디와 달리 르클뤼는 “고문을 당하는 고양이, 구타당하는 아이, 학대를 당하는 여자를 보고, 그것을 막을 만큼 강하다면 그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폭력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불가피한 것일 수는 있다고 본 그는 힘을 사용하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자연의 법칙, 신체적 충격과 반격의 결과”라고 했다. 폭력의 필요성에 대한 르클뤼의 입장은 크로포트킨의 도덕 원칙과도 거리가 있다. 또한 그는 1860년대에 협동조합 운동에 참여했지만 파리 코뮌 이후에는 협동조합과 커뮤니티를 단지 소수에게 이익을 주고 기존 질서를 그대로 두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노동자와 농민의 결합된 행동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사회의 완전한 변화를 주장했다. 나중에 그는 아나코 신디컬리즘과 거리를 두고 정부와 법률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제2 인터내셔널에도 반대했다.

한편 그는 자연주의와 과도한 노출도 옹호한 점에서 이채롭다. 알몸으로 사는 것이 옷을 입는 것보다 더 위생적이라고 주장한 그는 피부가 빛과 공기에 완전히 노출되어 ‘자연적인 활력과 활동’을 재개하고 동시에 더욱 유연하고 단단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누드가 더 아름답다고 주장했다. 의복에 대한 반대 이유는 도덕적인 것으로 그것에 지나치게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사상은 그것이 사물의 분류나 순서의 감각보다 앞서는 것으로 인간이 최초로 추구한 것이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다. 그 점에서 그는 ‘삶을 예술처럼, 세상을 예술처럼’을 추구한 윌리엄 모리스와도 통한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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