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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전에 해야 할 일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전에 해야 할 일
  • 주경철 서울대
  • 승인 2001.05.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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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03 17:12:18
주경철 / 서울대·서양사학>

이 글의 요지는 인문학 연구의 진흥을 위해 연구소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하고 그에 필요한 제도 개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현재 인문학이 처한 상황에 대해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을 분명히 하자. 인문학은 도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금 현재에도 인문학 분야에서 찬란한 성과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 현상 유지는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큰 문제는 사태가 갈수록 악화되어 앞으로 십 년 내지 이십 년 정도 지나면 정말로 인문학이 망해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현재 강사들이 인문학 마지막 세대?

무엇보다도 다음 세대의 연구자들이 완전히 단절될지 모른다는 문제는 심각하기 짝이 없다. 현재 박사학위를 받고 시간강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학문에 열정을 품고 이 길에 뛰어든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 교수직을 잡지 못한 이들이 전국을 누비며 고단한 강사 생활로 심신이 피폐해져 가다가 슬슬 다른 길로 빠져나가는 가운데, 많은 인문계열 학생들은 마지못해 최소한도로만 전공 학점을 채우고는 오직 고시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정말로 뜻이 있고 자질 있는 학생들이 없지 않지만 이들보고 대학원에 진학하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한 마디로 전망이 전혀 안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만간 인문학은 대가 끊어질 전망이다.

이 상태에서 그래도 뭔가 해야 한다면 연구소 활성화가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의 연구와 교육은 각 대학교의 인문대학 내 각 과가 중심이 되어왔지만 그와 같은 편제만으로 수준 높은 연구를 포괄적으로 수행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연구소들을 통해 인문학 연구를 심화하고 확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연구소의 활성화는 인력을 살리는 길이 된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우선 인문학 분야의 연구소가 대단히 부족하고 설사 있다고 해도 많은 경우 연구원들을 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임 연구원들을 둔 연구소들이 많아져야만 우수한 연구자들이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를 통해 인문학의 여러 분야들이 균형있게 발전하게 된다. 그러면 인문학 연구소들은 어떤 연구들을 수행해야 하는가? 대략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한적의 정리 해제 작업과 같은 대규모의 기초 연구, 둘째, 예컨대 유럽사, 불문학, 독문학, 서양 철학, 지리학 등의 여러 분야가 협력하는 유럽 지역학과 같은 학제간 연구 분야의 개발, 셋째, 반드시 필요하지만 기존 학과에서 하기 힘든 소수 분야(아프리카 역사, 만주어 연구 등), 넷째, 컴퓨터, 영상 분야 등 새로이 성장하는 분야들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당장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문학은 우리 사회를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기초 분야 및 응용 분야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그 효용은 실로 전사회에 걸쳐 대단히 광범위하다. 문제는 모두에게 도움을 주지만 직접적인 수혜 집단이 뚜렷하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당장 응용해서 돈을 벌 수 있는 분야라면 기업이든 대학 당국이든 곧바로 투자를 하지만 두루두루 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인문학 분야는 그 누구도 투자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요즘의 풍토이다. 심지어 교육 당국 역시 그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인문학이 이 사회를 위해 정말로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고 또 실제로 그와 같은 분야들을 더욱 개척하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문학자들 역시 오늘의 이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더라도 이 사회와 국가가 인문학에 대한 투자를 이처럼 회피하는 것은 진정 개탄할 일이다. 오늘 당장 돈이 안 되면 투자하지 않는다는 이 단순 무식한 분위기에서는 우리의 미래가 암울할 뿐이다.

넓이·높이 아닌 깊이에 투자해야

그러므로 인문학에 대한 투자는 우선 국가가 나서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단기간에 어떻게 써먹기보다는 다음 세대나 다다음 세대에 빛을 본다는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프랑스의 국립과학연구소(CNRS)나 미국, 일본의 연구소 제도를 보라. 다 그렇게 투자한 결과가 오늘에 이른 것이다. 지금처럼 변변한 인문학 연구소 하나 갖추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류 혹은 삼류 국가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인문학에 투자하는 것은 넓이나 높이보다 깊이에 투자하는 것이다. 가까운 미래의 우리 사회가 “영혼 없는 해골”이 아니라 사람 사는 사회로 남기 위해서는 오늘 당장 준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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