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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되는 ‘한국성’ 논의…탈식민주의적 건축사 필요성 공감
심화되는 ‘한국성’ 논의…탈식민주의적 건축사 필요성 공감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1.05.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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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03 17:11:06
전통이 “언제나 우리 자신의 일부이고 범례이며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라는 적극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의 가다머에 이르러서였다. 우리가 전통에 대해 가졌던 생각 역시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대단히 거칠고 설익은 것이었다. 미래로의 도약을 가로막는 과거의 미몽, ‘미성숙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부정되고 파괴되어야 할 과거의 유산, 그것은 근대성의 이념을 수혈받고 자라온 우리가 전통에 대해 가져왔던 통념에 다름 아니었다.

영원한 화두, 전통과 근대성

이러한 점에서 국내학계에서 ‘전통과 근대성’이란 문제를 둘러싸고 심도 깊은 담론들이 생산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전통과 근대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학문분야 가운데 하나가 건축학이다. 한국건축의 ‘전통’과 ‘고유성’ 문제를 둘러싼 학계의 논의지형을 보여주는 학술대회가 지난 21일 연세대에서 열렸다.

한국건축역사학회가 주최한 학술발표회 ‘한국 근현대 건축의 이론과 쟁점’이 그것이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김경수 명지대 교수(건축학과)의 ‘한국건축의 고유성은 어떻게 확인되는가’, 이상헌 건국대 교수(건축전문대학원)의 ‘근대 이후의 이론적 성과: 근대·탈근대·탈식민 논의’ 등 3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김경수 교수는 20세기 한국 건축학계의 지속적 쟁점으로 자리잡아온 ‘전통’과 ‘한국성’ 논의의 문제점을 다뤘다. 김교수가 지적하는 ‘한국성’ 논의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한국적인 것’의 고유성을 서양과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정의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서구의 근대성을 “기계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가치체계”로, 동양적 사유의 특징을 “관계론적 사유”로 규정짓고, 이러한 차이에 근거해 한국 전통건축의 특징을 추출하려는 우경국의 시도, 그리고 “서양이 이론에 치중하는 반면 동양은 깨달음과 해탈의 직접적 체험을 목표로 한다”는 김성우의 주장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처럼 ‘차이’에 근거해 ‘고유성’을 정립하려는 양분법적 대조방식은 과도한 단순화의 위험뿐만 아니라 실천적 무기력을 노정한다는 점에서 비생산적이기까지 하다. 김교수가 볼 때 “가치있는 관점과 방법이라면 서양의 것이든 동양의 것이든 수용하여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교수가 지적하는 ‘고유성’ 논의의 또 다른 문제점은 ‘언어’의 문제다. 이것은 한국건축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언어, 요컨대 ‘깨달음’·‘우주질서’·‘근원적 순환원리’와 같은 개념의 모호성과 관련된다.

이에 대한 김교수의 입장은 “한국을 말하는 언어가 반드시 고유한 것일 필요는 없다”는 것. 동양적 사유의 고유성에 대한 입론은 “신비한 주술이 아니라 지금의 언어 속에서 학습·전달·교육이 가능한 낱말로 다음세대에 전수될 수 있어야” 비로소 보편성을 띨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교수가 요구하는 것은 “현재와의 소통과 융합을 가능케 하는 번역과 공유작업”이다.

이상헌 교수는 ‘탈식민적 근대건축사의 정립’이라는 일관된 문제의식 아래 한국 근대건축에 대한 종래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그의 논의는 한국 근대건축론의 핵심쟁점, 요컨대 ‘전통건축에서 근대건축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단절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를 둘러싼 기존의 견해를 검토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지금까지 두 개의 흐름이 대립해 왔는데, 한국 근대건축의 시작을 서구 양식건축의 수용에서 찾는 이른바 ‘이식론’과 조선후기의 변화상에서 자생적 근대건축의 씨앗을 발견하려는 ‘민족건축론’이 그것이다. 하지만 김교수는 두 가지 흐름 모두 서구 근대성의 발전논리를 비성찰적으로 전유함으로써 서구중심적 근대를 단순히 재생산하는데 그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 듯 보인다. 서구의 탈식민성 논의에 입각, ‘근대적이되 서구적이지 않은 건축’의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최근의 실험들 역시 ‘문제적’이긴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요컨대 김교수는 한국 근대건축에서 한국성을 찾으려는 다양한 시도들 또한 서구적 근대성에 의해 규정된 (정신과 물질이라는) 동서양의 단순한 대립구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스스로를 식민성의 굴레에 속박하고 말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교수가 내세우는 대안은 무엇일까. 굳이 명명해 보자면 ‘비판적 근대건축사’ 쯤이 적절할 법하다.

김교수에 따르면 “진정한 근대성이란 서구적인 것도 그것의 대립개념으로서 전통적인 것도 아니다.” 식민지적 근대의 특징인 “부분적·파편적 근대화는 이미 진정한 근대성의 일부”이며, 전지구화가 심화된 시대에 “서구적 근대성의 틀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탈식민성의 핵심은 “타자의 주체성과 중심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제3세계의 역사 안에 새겨진) 서구적 근대성의 모순, 다시말해 “역사 안의 균열과 모순, 변형과 차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재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김교수의 견해다. 물론 그것이 어떤 형태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김교수 역시 뚜렷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비판적 근대건축사’를 향하여

이날의 행사는 개진된 논의의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근대건축사 기술의 ‘새로운 경향성’을 엿보기에 충분한 자리였다. 그 경향성이란 다른 분과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찰성’과 ‘소통가능성’이 강조된 역사기술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우리는 ‘탈전통적 질서’의 등장으로 특징지어지는 급진화된 후기근대사회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러한 사회 역시 전통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필요한 전통은 과거와 같은 의미의 전통이 아니다. 전지구화와 사회적 성찰성(social reflexivity)이 심화된 시대에 전통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옹호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설명하고, 담화와 질문에 개방적인 전통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근본주의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이세영 기자 syle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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