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의 경우, 그 감격이 감사의 기도로 이어지는 것은 얼핏 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췌언을 무릅쓰고 이 비평적 사족을 붙이는 이유는 다만 두 가지다. 첫째, 알다시피 이 ‘자연화(naturalization)'의 기제가 이른바 '부드러운 지배와 자발적 종속'의 요체라는 사실이며, 둘째, 스포츠 경기장의 기도 풍경은 특별히 한국 선수들에게서 유난스럽다는 점.
필시 스포츠 사회학과 종교 사회학이 성글게 겹치는 영역, 그리고 이 영역이 급속히 현대화되면서 겪은 문화적 변용을 오래 탐색해야 할 것이다. 스포츠 문화가 계몽주의적 근대화의 한 갈래를 이뤘다거나, (로마의 원형경기장 황제들이나 한국의 체육관 대통령들이 고스란히 예시했듯이)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하위 단위로 널리 보급됐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이 됐다. 반면, '기도하는 선수들'이 극적으로 연출하는 스포츠와 종교의 私通은 그야말로 개인적 열정의 유형화로 보이며, 또 그만큼 아무도 미워할 수 없는 순진한 풍경일 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편 '기도하는 선수들'이라는 집단적 표상은 고대의 전쟁 영웅상을 승계, 반복한다. 軍神 오딘이나 마르스의 제단, 그리고 관운장의 사당에 武運을 기원하거나 승전을 감사하는 종교주술적 의식은 '기도하는 스포츠 선수들'의 이미지 속에서 문화적으로 변용돼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종교와 스포츠가 극적으로 습합되는 순간의 심리학을 헤아리는 짓은 아무래도 재미없다. 무릇, 모든 심리학은 알면서 모른 체 하는 것이 오히려 묘미일 뿐이다. 설혹 그 심리학에 왜곡과 倒錯의 구석이 있다고 해도 각박하게 따지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와 스포츠가 이데올로기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수렴하려는 짓도 역시 낡디 낡은 수작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잔존하는 神話가 기생하는 방식이 아닐까. 요컨대, 현대의 신화들은 스포츠를 포함한 갖은 문화산업과 그 광고적 장치들에 기생하는 것으로 연명하고 있다. 생각해 보시라. 매스컴을 타고 순식간에 퍼지는 '기도하는 선수'라는 이미지는 종교인가, 스포츠인가, 혹은 제3의 트기인가. “모든 운동은 신화적 지평을 통해서 완결 된다”는 니체의 말처럼, 현대의 유일한 운동, 그러므로 신화가 돼버린 스포츠 역시 잔존하는 신화와 종교의 아우라를 통해 번성하는 것이 아닐까. 종교가 스포츠를 축원하는 유사 종교적 儀式은 그 자체로 스포츠 산업 체계의 일부일 뿐, 그 체계의 신학적 정당화는 아닌 것!
김영민 / 한일장신대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