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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진단_'월간미술'이 사는 법
기획진단_'월간미술'이 사는 법
  • 강선학 미술평론가
  • 승인 2004.09.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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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부재의 권력의지가 안타깝다

미술잡지가 논쟁적 당파성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고 대답하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인가 하고 물으면 조금은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간행 미술잡지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서너 종 나오는 미술잡지가 당파성을 갖기보다 다양한 현대미술 활동을 담을 수 있는 것이기를 바란다. 게다가 그 운영의 어려움을 생각한다면 버텨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때가 많다. 그리고 雜誌라고 하듯 ‘雜한 것’이 그 속성이 아닌가. 그러나 현실의 곳곳을 더듬고 찾아가지는 못하더라도, 준열한 자기태도를 통해 현실을 해부하고 미술현장에 대한 담론이 형성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비평같은 단평들만 양산돼"

문학동네에서의 1990년대와 그 이후의 논쟁, 아직 그게 끝나지 않았지만 출판사가 운영하는 잡지에서 생산된 작가의 과대포장과 그것을 상찬하는 비평가에게만 지면을 줘 논쟁거리가 됐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상업주의에 의한 음험함만이 아니라면 도리어 부럽기조차 하다. 오늘날 공유할 어떤 담론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비명 같은 단평들만 양산하고 있는 미술동네를 바라보면 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굳이 특정 미술잡지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월간미술’이 그 영향력이나 연륜으로 봐서 한번쯤은 자신의 편집태도에 대해 섬세한 자기성찰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화제의 전시’에서 현장비평의 진지함이 없지 않지만 ‘전시리뷰’는 비평이기보다 전시소개에 그치고 있다. 비평의 일차적 현장이 너무나 작은 지면에 억지로 구겨 넣은 듯 배치되고 있다. 다양한 소개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궁색하다. 두 세 작가들의 집중적인 소개를 제외하면 현장의 작가와 작품은 언제나 뒤로 밀려있다. 집중적인 조명을 받는 작가도 실은 두세 쪽에 걸친 글이 전부다. 그것도 작품세계에 대한 분석이기보다 전기적 접근에 가깝다. 한 작가의 세계를 이해할만한 정도로선 턱없이 부족한 지면이다. 나머지는 그림으로 이해하라는 시각이미지를 다루는 잡지 속성의 하나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미술계를 장악하는 미술잡지의 편집 태도로 보여질 때, 이런 태도는 심각하다. 그림을 생각하지만 작가는 뒷전이고, 눈을 끌만한 이미지이지만 담론이 없다. 그림소개로 지면을 메우고 있는 셈이다. 그림에 대한 담론이 없다는 것은 광고판 시각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품세다. 그리고 작가는 그래도 그 이력이라도 몇 줄 밝혀주고 있지만 필자는 아예 몇 마디로 끝이다. 어디 대학 교수, 독립 큐레이터, 미학, 예술학, 노문학, 그렇게 표기하는 것이 전부다. 굳이 필자를 밝혀달라는 요청이 없을 수도 있고, 역으로 작가보다 필자가 잘 알려져 있다(?)는 설명도 가능하겠지만 필자가 작가에게 밀려나듯이 비평의 논리는 시각적 이미지에 밀려나 있다.

그리고 언급될 전시도 잡지사가 대부분 칼자루를 쥐고 있다. 필자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필자를 소극적이고 최소한의 필요로 요구되는 층위로 밀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미술잡지에서의 미술 비평이나 미술 담론의 위상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말하자면 미술판의 담론이나 움직임에 비평가보다 자신들, 잡지사가 영향력을 가지겠다는 전략이다. 거대 일간지가 모태였던 때문일까. 기자가 기획기사를 쓸 수 있지만 비평적 담론이라 보기 힘들다. 그런 구석에서 무슨 비평의 활성화를 이야기 할 수 있는가.

그냥 일차원적 이야기를 해보자. 다 아는 것 같은데도 말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미술잡지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암묵적 담합이다. 전시선택에 있어 잡지사의 우선적 선택권, 물론 이것은 원고 청탁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는 일이지만 대부분 잡지사가 게재할 작가나 작품을 정한 후 청탁을 한다. 이럴 경우 평론가는 글을 쓸 것인지 말 것인지를 표현할 수 있을 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런 흐름이 우리 미술잡지의 대체적인 흐름이다. 이 흐름은 바로 평론가의 작가, 작품 선택의 한계이다. 자발적 연구나 비평문이 아니라 청탁된 것이고, 글이 어떻게 취급될 것인지, 때로는 제목마저도 잡지사의 편집태도에 달려 있다.

권력구조에 끌려가는 미술계

나는 이것을 미술계의 영향력을 어느 층에서 잡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고 본다. 그것은 우리 현대미술 초기에 보이던 국내외 기획전시에 작가 선정권을 두고 끊임없이 원로작가나 소장 작가들이 다퉜던 문제와 다르지 않다. 비평 풍토와 비평가 부재의 상황과도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비평의 불신에서 연유한 것이기보다 미술계의 영향력이라는 권력의지에서 생긴 문제다. 여전히 그런 정도의 구조가 미술계를 끌고 있다.

작품과 평론가의 논지가 문학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다면, 미술은 작가와 작품이 중심에 있다. 작품에 대한 가치판단이나 논리보다 시각이미지가 더 중요하다. 그게 미술잡지의 기본적인 태도로 보인다. 미술비평의 관건은 거기 있다고 본다. 그리고 문학이 자사 중심의 잡지에 상업성을 염두에 둔 작품 선정과 작가 선정에 평론가들의 묵인과 담합과 거부와 반발이 있다면 미술은 아예 자사 중심의 작가선정만 있을 뿐 가치나 논리가 들어설 자리조차 협소하다. 상업성이 강한 메이저급 화랑에서 하는 전시에 대한 지나친 배려를 상업적 선택이라고 하면 그런 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반대논쟁이나 거부 같은 구조가 미술계에는 아예 없다. 미술의 담론보다 소개와 선택이라는 기사중심의 체계가 바로 오늘날 미술비평과 담론 부재, 비평불신의 뒤편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강선학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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