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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기계에서 디지털 생명체까지
생물학적 기계에서 디지털 생명체까지
  • 이인식
  • 승인 2001.05.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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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03 11:21:35
이인식 / 과학문화연구소장

생명의 본질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칸트, 스펜서, 베르그송 등 철학자들의 관심사였으나 오늘날 너무나 ‘과학적’인 주제로 여겨져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과학자들은 생명의 본질이 지나치게 ‘철학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서 진지하게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과학자 중에서 생명의 본질에 체계적으로 접근한 선구적인 인물로는 물리학자인 에르빈 슈뢰딩거(1887∼1961)와 수학자인 존 폰 노이만(1903∼1957)을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다른 개념으로 생명 문제에 접근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잇다.

슈뢰딩거와 노이만의 선구적 시도

슈뢰딩거는 1933년 파동역학을 창시한 업적으로 노벨상을 받은 양자물리학자이다. 유전자(DNA)의 분자구조가 발견된 해보다 10년 전인 1943년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 생물학 강좌를 개설하고 생명현상이 결국 물리학과 화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강의는 이듬해에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생명체의 두 가지 근본적인 기능인 복제와 신진대사에 대한 개념적 기초를 물리학에서 찾아냈다. 복제는 양자역학으로, 신진대사는 열역학으로 설명을 시도한 것이다. 그가 제기한 문제들은 훗날 분자생물학의 시대를 연 과학자들의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생물학자들은 생명을 여러 각도에서 정의했으나 모두 불완전하고 약점을 지니고 있다. 1965년 노벨상을 받은 프랑스의 자크 모노(1971)는 생명의 특질로 합목적성, 자율적 형태발생, 복제 불변성 등 세 개의 특성을 제시했다. 모노는 생명이란 어떤 계획을 부여받은 물체(합목적성)로서 자기 자신을 만들어내는 기계(자율적 형태발생)이며 자기 자신의 정보를 복제하고 또 불변인 채로 전달하는 힘(불변적 복제)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칠레의 움베르토 마투라나(1973)는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함께 생명의 기본으로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 개념을 내놓았다. 그리스어에서 빌려 만든 이 용어는 자기형성을 뜻한다. 생물체는 신진대사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갱신을 하여 스스로의 조직을 유지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생물체의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능력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이 개념이 발표될 당시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생명체가 환경과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투라나의 오토포이에시스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DNA 분자 구조를 발견한 프란시스 크릭(1981)은 자기증식, 유전과 진화, 신진대사를 생명의 본질로 제시했으며 진화생물학자인 에른스트 마이어(1982)는 △복잡하며 적응하는 조직 △거대분자의 화학적 집합 △양보다 질적인 현상 △유일한 단위의 다양한 집합체 △진화된 유전 프로그램 △공통 혈통 △자연선택의 소산 △예측불가능한 생물학적 과정 등 여덟 개를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 짓는 특성으로 나열했다. 도인 파머(1992)는 △시공간에서의 패턴 △자기증식 △자기표상의 정보 저장 △신진대사 △환경과의 기능적 상호작용 △구성부분의 상호의존성 △혼돈에서 안정성 유지 △진화능력 등 역시 여덟 가지를 생명의 특성으로 제시했다.

슈뢰딩거가 더블린에서 강의를 마치고 5년이 지난 뒤인 1948년, 폰 노이만은 프린스턴에서 행한 연설에서 컴퓨터 이론의 선구자답게 유기체처럼 자기증식하는 자동장치(automata) 이론을 발표했다. 생물체가 자기증식하는 과정이 생물체를 구성하는 물질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말하자면 생명현상의 핵심인 신진대사와 복제가 논리적으로 분리될 수 있다고 본 셈이다. 폰 노이만에 의해 신진대사를 할 수 없지만 복제는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로 유기체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폰 노이만의 아이디어는 40년 가까이 생물학자나 컴퓨터 과학자들의 관심권 밖으로 크게 밀려나 있었다.

생물과 무생물을 구별하는 특성의 하나인 증식기능을 기계로 실현할 수 있다는 폰 노이만의 이론은 1987년 인공생명(A-life)이 새로운 학문으로 발족한 것을 계기로 생명의 본질에 관한 연구에 불을 붙여놓는다. 왜냐하면 인공생명이 생명을 이해하는 방법에서 생물학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생물학에서는 생명체를 하나의 생화학적 기계로 보지만 인공생명에서는 단순한 기계가 여러 개 모여서 구성된 집합체로 간주한다. 따라서 인공생명에서는 생명을 이러한 구성요소의 상호작용에 의해 복잡한 집합체로부터 출현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생명을, 생물체를 구성하는 물질 그 자체의 특성으로 보는 대신에 그 물질들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창발하는 특성(emergence)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요컨대 생명이란 하위계층인 단백질에는 없지만 상위계층인 유기체에서 창발하는 현상이다.

인공생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명의 개념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하나는 유기체에 대한 정의이다. 생물학에서는 유기체의 구성물질을 탄소로 전제하지만 인공생명은 컴퓨터, 즉 실리콘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생명에 대한 접근방법이다. 생물학은 개체, 기관, 조직, 세포의 순서로 계층을 내려가면서 구성물질을 분석하는 하향식인 반면에, 인공생명은 비선형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구성요소를 적절한 방식으로 조직하면서 집합체의 행동을 합성하는 상향식이다. 말하자면 생물학은 환원주의에 의존하지만 인공생명은 전일주의에 입각하여 생명의 이해에 접근하는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생명은 복잡성 과학의 범주에 포함된다.

초유기체: 인간과 정보기술의 결합

복잡성 과학에서는 생명을 자기조직화의 산물로 간주한다. 미국 산타페 연구소 쪽의 스튜어트 카우프만과 크리스토퍼 랭톤, 벨기에 브뤼셀의 일리아 프리고진은 제각기 특유의 논리로 생명의 본질을 정의하고 있다.

복잡성 과학의 연장선상에 있는 특이한 생명 개념이 초유기체(superorganism)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가이아 이론이다. 지구를 생물과 무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초유기체로 본다. 마투라나의 오토포이에시스 개념이 이론적 근거로 활용된다. 한편 2010년경 인터넷이 사람에 버금가는 지능을 가진 거대한 디지털 생명체가 되면 인류와 정보기술이 결합된 전지구적 규모의 초유기체가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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