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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 '삶과 온생명' (장회익 지음, 솔 刊, 1998, 410쪽)
본격서평: '삶과 온생명' (장회익 지음, 솔 刊, 1998, 410쪽)
  • 장대익 서울대
  • 승인 2004.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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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현상에 대한 독특한 이해 주목해야

얼마 전 이 책의 저자인 장회익 교수와 대화를 나누다가 다소 곤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사람들이 왜 온생명 이론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하느냐고 말이다. 갑작스런 질문이긴 했으나 나는 평소의 생각을 털어 놓았다. “온생명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기본적인 물리학 지식과 함께 이론 생물학적 이해가 동시에 필요한데 그걸 갖춘 분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게다가 온생명론이 기존의 논의들을 뛰어넘으려는 시도이니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려면 열린 마음까지 있어야 한다.”

이미 오래 전에 ‘과학과 메타과학’(1990)으로 국내에 ‘메타과학’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과학철학을 소개한 저자는 ‘삶과 온생명’(1998)에서 한 사람의 동양인 물리학자로서 생명, 인간, 그리고 문명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있다. 물리학에 디딤발을 두고 있다는 면에서는 전 저작과 연속선상에 있지만, 논의 주제들이 전통학문의 역사와 철학, 이론 생물학, 과학과 종교 문제, 심지어 학문학(학문함에 대한 성찰)으로까지 뻗어나갔다는 측면에서는 물리학의 울타리를 훌쩍 넘어선 느낌이다.

무관심에 가까운 자연과학자들의 반응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저자는 한 사람의 ‘동아시아인’으로서, 하지만 서양 과학의 꽃인 ‘물리학’ 전공자로서 생명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 문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이 새로운 이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 학문은 ‘삶’을 지향하고 생명현상에 대한 서구 과학의 성과는 ‘온생명’ 이론으로 귀결되며 이 둘은 유기적으로 융합돼 있다.

사실, 저자의 독창적인 온생명 개념은 대학 입시에서도 자주 등장할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대중들의 관심뿐만 아니라 학계의 관심조차도 거의 대부분은 온생명론의 인문사회학적 함의들(예컨대 환경철학, 윤리, 종교적 함의들)에 초점이 맞춰져왔다.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런 결과일 것이다. 온생명론은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이나 카프라의 ‘생명의 그물’ 이야기를 훨씬 능가하는 인문사회학적 함의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이런 장점은 온생명론의 온전한 이해를 가로막아왔다. 그동안 학계 안팎에서 펼쳐졌던 온생명론에 관한 담론들은, 그 이론의 자연과학적 측면에 대한 이해와 평가는 제쳐둔 채, 특정한 인문사회학적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데 주로 사용돼왔다. 물론 그런 작업 자체가 비난받을 이유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이 온생명론을 다양한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는 통로로 이용됐다는 측면에서도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더 많은 열매를 따먹기 위해서는 그 열매에 대한 좀더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주춧돌인 6장(생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명료한 이해가 없이는 책 전체의 의미와 공헌을 정확히 포착하기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이 책의 열렬한 독자들인 인문사회학자들에게 사실 이 책은 결코 녹녹하지 않다.

그렇다면 자연과학자들에게는 어떨까. 20세기 과학사를 보면 생명의 본질을 탐구하는 ‘물리학자들’의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다. ‘생명이란 무엇인가?’(1944)를 쓴 슈뢰딩거가 그랬고 DNA의 구조를 발견한 왓슨과 크릭도 따져보면 물리학의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생명의 본성은 생물학에서만 다뤄질 내용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 현상 자체에 대해 관심이 있는 그 어떤 분과의 자연과학자들에게도 이 책은 매우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온생명론에 관한 자연과학자들의 반응은 인문사회학자들이나 대중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 같다. 동의나 인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박도 아니다. 오히려 무관심에 가까운 반응들이다. 그들은 저자의 글을 읽어보기도 전에 온생명론이 신과학류의 전일론적 접근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이게, “환경철학적 함의들은 수긍할만한데 과학 이론으로서의 온생명 개념은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저자의 온생명론이 생명현상에 대해 관심이 있는 국내의 자연과학자들에게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논리적 절차만을 따져본다면, 이런 작업이 제대로 수행된 다음에라야 인문학자들의 몫이 남지 않겠는가.

“온생명론은 학제적 연구의 진정한 범례”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사실은, 생명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과 접근 방식 자체가 현대 생물학계의 큰 논란거리 중 하나인 유전자 개념에 대한 그것들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유전자 홍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유전자’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쯤에는 쉽게 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도 유전자의 정의는 난제 중 하나다. 그동안 몇 가지 정의들이 논의돼왔으나 아주 최근에는 단백질 합성 절차에 관여하는 DNA 단편과 그 주변의 세포 환경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대안적 개념이 나오기까지 했다. 이 접근법은 생명에 대한 저자의 접근법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단지 논의 대상의 수준만이 다를 뿐이다. 또한 생명의 ‘단위’(unit)에 관한 탐구는 최근 생물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부상한 ‘모듈성’(modularity) 논의와도 맥을 같이 한다.

자연과학적 측면에서 저자의 주장이 모두 참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온생명론을 곱씹어 보지 않은 채 자신들의 탐구 가설들 목록에서 그것을 너무나 빨리 삭제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온생명론에 대한 자연과학자들의 관심은 자연과학적 연구를 촉진하기 위해서라도 가치있는 작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온생명론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엄청난 인문사회학적 파괴력을 지니면서도 자연과학적 연구 성과로 빚어졌기 때문이다. 온생명론은 학제적 연구의 진정한 범례이다.

이 책의 가치에 대해 한 가지만 더 말하고 싶다. 단편적인 글들의 모음이라지만 놀랍게도 이 책은 내내 ‘동아시아인으로서 과학함’이 어떤 것인지를 묻고 답한다. 사실, 이런 화두 자체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 ‘네모난 원’처럼 성립조차 안 되는 질문이기 쉽다. 자연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자신의 국적을 따지는 법이 없다고들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저자의 정체성 질문은 한갓 노년의 여유로움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 어떤 자연과학자보다도 보편학문에 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 단지 서양의 과학과 동양의 전통학문이 한 데 융합된 ‘더’ 보편적인 학문을 위해 ‘동아시아인으로서의 과학함’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동아시아인으로서의 학문함’이라는 주제로 인문사회학계가 술렁였던 경험을 상기할 때 ‘동아시아인으로서의 과학함’이라는 질문도 한번 다뤄볼 만한 주제다.

‘삶과 온생명’은 동양학문과 서양과학, 물리학과 생물학, 과학과 인문학이 한 사람의 물리학자 안에서 얼마나 조화롭게 융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절묘한 줄타기의 교본이다. 이제, 이런 저자의 넘나듦의 미학을 본받아 온생명론과 이 책의 다른 중심 주장들에 대한 입체적이고 공정한 조명을 해볼 시점이다.

장대익/서울대·자연철학

 

'삶과 온생명'을 어떻게 논의할 것인가

장회익 교수의 '삶과 온생명'에 대해서 가장 최근에 본격적인 접근이 이뤄진 경우로는 한국과학철학회가 펴낸 '온생명에 대하여-과학과철학 제14집'(통나무 刊)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삶과 온생명'이 제기한 동양사상, 윤리학, 생명철학, 가이아와의 연관에 대해서 논쟁적으로 따져보는 책들이다. 기존 논의에서는 비교적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역시 자연과학적 검토는 부실했다고 할 것이다. 집필자 12명 중에 생물학자, 환경학자, 과학사 등이 고루 포함됐지만 이들은 철학이나 사회학, 역사학 쪽 논의로 기울었기 때문에, 진짜 과학적 검토는 딱 1편에서만 이뤄졌다. 앞으로 물리학자, 화학자 등이 본격적으로 가담해야 할 것인데, 화학 쪽에서는 자연과학 전반에 대해 원초적 조망에 관심을 갖고 있는 김휘준 서울대 교수, 생물학 쪽에서는 장회익 교수와 생명을 보는 관점이 다른 최재천, 홍영남 서울대 교수 등이 논쟁을 벌여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견해다. 또한 물리학쪽에서는 엔트로피와 정보를 주제를 해서 '삶과 온생명'을 검토하면 다른 입장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온생명'은 '학제성'과 '학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도 던져준다. 이 책은 물리학자가 본 생물학, 동양인이 본 서양, 과학자가 본 인문학 등 한 물리학자 내부에 수많은 인터-디시플린을 갖춘 책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현재 이뤄지는 학제적 연구에 대한 학계의 철학적이고 학문적인 성찰을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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