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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들을 추억함_①헌책방
사라지는 것들을 추억함_①헌책방
  • 박태일 경남대
  • 승인 2004.08.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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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가라앉은 먼지의 마을

그 마을로 가는 첫 기억에는 울음소리가 섞여 있다. 철부지 중학생이 학교 공부는 않고 시집이나 끼고 있는 데 낙담하셨던가 보다. 아버지는 책을 연탄아궁이로 찢어 던지셨다. 서럽게 울면서 그것을 건져낼 때부터 장차 헌책방 순례는 짜릿한 즐거움으로 예정돼 있었던 셈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 헌책방 나들이는 전공 학습을 핑계로 더욱 떳떳한 취미로 올라섰다. 논산훈련소 입대 전날 대전에서 사서 부친 헌책을 받아놓고 어머니는 많이 우셨다 한다. 몇 푼 쥐어 보낸 돈을 그렇게 날려버린 데 대한 야속함은 컸으리라.

어느 일이든 도가 지나친 경우는 있다. 헌책방을 드나들었던 기억 탓에 내 지난 시절은 여러 길 여러 풍경으로 아기자기하다. 각별한 책은 그것을 얻었을 무렵, 그 서점의 모습까지 고스란히 살아 있다. 은밀한 탐닉일수록 즐거움은 두고두고 새삼스러운 법이다.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중소 도시에서는 한둘 찾을 수 있었던 게 헌책방이었다. 한때 대표적인 서점가를 이루며 번성했던 부산 보수동 골목은 물론 대구 시청이나 광주 계림동 거리마저 썰물이 빠져나간 꼴이다. 하나같이 몇 집만 남아 마지막 풍경을 연출한다.  

오래도록 우리 사회는 책에 대한 수집과 보관의 경험이 너무 엉성했다. 중요한 사회적 기억과 지식을 갈무리하고 있는 문헌에 대한 망실이야말로 근대의 문제적 경험 가운데 하나다. 하찮다고 내버린 서책 속에 뜻밖에 무거운 진실이 담겨 있는 법이다. 노교수의 장서 기증을 오히려 귀찮아하는 곳이 대학 도서관이었다. 당장 보는 이 없다고 반백 년을 훌쩍 넘긴 학교 도서관이 묵은 책부터 폐기 처분한다. 그런 홀대를 거쳐 흘러 들어온 책 더미를 운 좋게 만나는 기회도 있다. 허겁지겁 보석에 잡석이 따로 없이 달려든다.

그런데 헌책방의 몰락에는 뜻밖에 종이 재활용이 한 몫을 했다. 그것이 일상화하면서 아파트로, 고물상으로 돌아다니던 소규모 수집상은 손을 놓고 말았다. 부동산 투기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세월없는 헌책방이나 그들에게 책을 대주었던 고물상이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기란 어렵다. 폐휴지를 차떼기로 실어내는 대단위 수거 체계는 종이 재활용에만 뜻을 두지, 책의 재활용에는 마음이 없다. 종이 금이 좋은 터에 굳이 손 많이 가는 책 선별을 거칠 까닭이 어디 있으랴. 헌책들이 깡그리 파지공장으로 직행하는 까닭이다.

거기다 경기를 이끌었던 참고서 시장의 몰락은 결정타를 날린 격이다. 값싼 참고서를 얻기 위해 집과 학교 근처를 벗어나 먼데 헌책방까지 나가보는 도심 여행의 신선한 경험은 이즈음 학생 세대에게는 낯설다. 어버이들도 새책 구입을 당연시한다. 그 마을에서는 모진 절연과 망각으로 말미암은 탄식 소리가 깊다. 책 판매처이기 앞서 친교공간이었던 헌책방. 크고 작은 단골서점의 주인들은 나이에 치이고 세월에 밀리면서 하나 둘 문을 닫았다. 그래서 그 마을로 가는 길에는 오래 전에 다쳤던 자국처럼 빨간 접시꽃이 가끔 고개를 든다.

헌책방은 도시 안에 가라앉아 있는 먼지의 마을이다. 웅숭 깊은 먼지의 길이 있고, 먼지의 가족이 모여 산다. 놀라움과 설렘을 온몸에 아로새긴 채 켜켜로 떠다니는 빛과 어둠의 일터가 있다. 사라져버린 옛 숲의 물소리가 맞바람을 일으키는 종이 담장이 낮다. 밤늦도록 환히 등불을 밝혀 둘레 풍경을 제 속으로 끌어안는 활자의 다락방이 있다. 왜 그 마을로 가는 걸음은 늘 조바심 쳤을까. 문이 닫혀 어쩌면 들어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시달렸을까. 나는 어느새 완연히 날 저문 그 마을 바깥을 서성거린다. 쓸쓸한 일이다.

박태일 / 경남대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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