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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서 쓰면 손가락질 당해…원서 사용 오히려 증가
교양서 쓰면 손가락질 당해…원서 사용 오히려 증가
  • 권기호 과학칼럼니스트
  • 승인 2004.08.30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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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_과학 교양교재 출판의 현황과 과제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물질세계는 양방향성을 강화해 가고 있으며, 이것은 삶의 모든 분야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상품화와 보편화를 주도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물질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정신세계나 지식세계의 한편에서는 양방향성이 약화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과학 커뮤니케이션이다.
미셸 푸코의 말처럼 아는 것이 힘, 곧 권력이므로 먼저 많이 알고 독점하려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20세기에 들어서 과학?기술은 드디어 권력을 쥐게 되었고 세계는 치열한 과학기술 전쟁을 벌여 왔다. 권력에는 부와 명예가 따르므로 급격히 늘어난 과학기술자들은 무한 경쟁 속에서 선취권과 독점주의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젊은 교수들일수록 원서 의존도 높아

더구나 우리나라는 서구의 과학기술을 산업 발전의 원동력으로만 받아들여 ‘지식인’이 아닌 ‘전문가나 기술자’만 양산하고 그들을 이용하는 데 골몰해 왔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은 철학과 역사 같은 근본 문화가 없는 사상누각이며, 과학기술자들에게 과학 커뮤니케이션에 동참하라고 하기도 어렵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과학기술자들은 그러한 근본 문화를 제대로 교육받은 적이 없을뿐더러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할 의지도 시간도, 능력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수리물리학자 앨런 소칼은 인문학자들의 ‘지적 사기’를 신랄하게 꼬집었지만, 사실 그러한 지적 사기를 야기한 데에는 자연과학자들의 잘못이 크다. 많은 자연과학자들은 발견하거나 발명한 사실을 책이나 강연을 통해 쉽게 설명하기보다 현학적 아우라를 씌워 고답적인 것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할머니에게 설명할 수 없다면 진정으로 정통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난해함은 단절과 오해와 왜곡을 낳는 법이다.
우리나라에서 과학 출판을 비롯한 과학 커뮤니케이션이 침체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국가 정책이다. 과학기술을 이 시대 문명과 생활의 일부로서 인식하지 않고 경제 발전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한, 과학기술은 교과서와 실험실의 장벽을 허물고 세상과 소통할 수 없다. 편향된 교육 제도는 말할 것도 없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학문인데 초·중·고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주체인 인간을 빼고 나머지만 가르친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과학기술이나 그 산물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하거나 사회와 문화를 해석하는 일 따위에 관심이 없다.
이제는 많은 교수와 학생이 그 못된 타성에 젖어 있다. 유학파 젊은 교수들일수록 원서와 외국어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며, 학생들은 마지못해 또는 환상에 젖은 채 따라가고 있다. 자연히 우리말로 된 교재나 교양서는 줄어들고, 범람하는 새로운 용어와 개념들이 번역되지 않은 채 고착화되는 현상도 폭증하고 있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 언어의 문제로 이어진다. 언어는 인식의 출발점이므로 언어 자체가 혼란스럽거나 난해할 경우 커뮤니케이션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우리 후손은 외국어에 대한 엄청난 부담을 안은 채 과학기술을 더 기피할지 모른다.

‘수준 낮은 독자’ VS ‘역량 부족 저자’

최근 과학 교양서 번역물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몇몇 소장파 과학 저자들이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해 왔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과학 교양서 시장의 성장을 논하기는 이르다. 우선 번역물의 경우, 교양서의 종수는 늘었지만 평균 판매 부수는 줄어들었고, 과학기술 발전의 기초가 되는 교재나 학술서도 원서 사용의 증가로 오히려 줄었다. 국내 저술의 경우도 초·중·고교생을 위한 에듀테인먼트 내지 부교재만 늘었지 대학생이나 일반인을 위한 고급 교양서는 여전히 드물다.
읽을 만한 과학책이 없어 못 읽는다는 독자와, 읽어 주는 독자가 없어 과학책을 못 내겠다는 저자나 출판사 중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야 한다면 지금은 독자의 편에 가깝다. 재미있고 쉽게 또는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쓸 만한 지식 인프라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저자나 출판사의 외침은 공허하다. 왜냐하면 저자나 출판사가 독자의 수준과 기호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책을 펴낼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수준 낮은 독자’ 탓만 하는 저자가 있는가 하면 ‘역량 부족인 저자’ 비난만 하는 독자도 적잖다.
또한 교수나 전문가 집단에서 ‘대중을 위한 책’을 펴내는 것이 ‘딴전’을 부리는 것으로 낙인찍히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진지한 순문학 작가의 조금 경쾌한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그 작가가 문학적 순수함을 잃은 것으로 내몰리듯, 대중을 위한 교양서를 쓰면 학문적 순수함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손가락질당하는 풍토는 과학 교양서 출판 활성화에 큰 걸림돌이다.
그렇다면 얼핏 대학출판부에 기대를 걸어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대학출판부는 대학 부설 편집·인쇄소나 다름없다. 대학출판부장이라는 자리도 대개 교수들이 번갈아 가며 임기만 채우기 때문에 눈여겨 볼만한 출판 콘텐츠가 별로 없다. 우리나라는 정부 지원 부족, 도서관 부족, 불법 교재 복제 같은 눈앞의 주요 장애가 먼저 해소되고 과학 교육이 혁신되어야만 과학 교양서 출판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권기호/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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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2004-08-30 10:29:59
우리나라는 정부 지원 부족, 도서관 부족, 불법 교재 복제 같은 눈앞의 주요 장애가 먼저 해소되고 과학 교육이 혁신되어야만 과학 교양서 출판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

위에 언급된 내용은 우리나라에서는 도무지 개선될 것 같지
않은 데, 그럼 우리나라는 영원히 절망적인가요?
과학 교양출판 활성화를 위한 좀더 가능하고 실질적이며,
구체적인 방안은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