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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_전시서문, 이대로 괜찮은가
진단_전시서문, 이대로 괜찮은가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4.08.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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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에 2백만원 받기도...최소한의 비평의식 용인돼야

미술계에서 전시서문만큼 잡음을 일으키면서도 탄탄하게 정착해온 제도도 드물다. 평론가나 큐레이터가 쓴 서문 없이 전시회를 여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저명한 평론가들은 물량이 넘쳐 한달에도 몇 편씩 지치지 않고 쓴다. 평론가로부터 작품 평을 들어볼 기회가 많지 않은 작가들은 서문을 받고 만족해한다. 서문은 자기작품에 붙은 ‘KS마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론가든 작가든 ‘서문’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돈과 인맥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별로 없다. 대학에서의 위치나 명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게는 수십만 원에서 2백만 원까지도 오간다. 더 큰 문제는 돈과 친분이 매개가 되다보니 주례사비평이나 치하에 머문 글들이 마구 양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권력에 눈치보는 오염된 글들

이런 관행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은 이따금씩 지적돼왔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는 ‘한국 미술계의 구조와 권력’이란 글에서 “작품 평이나 작가론에 실리는 글들은 작가들에게는 자신의 입장을 미화하거나 찬양하는 선에서 이뤄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미술평론가 김장언 씨도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평문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경제 활동을 지속하고 자신의 지위를 확인한다”라며 “서문의 글쓰기는 미술계 담론의 권위에 기댄 오염된 언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관행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해외에서는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가 직접 서문을 쓰지만, 국내에선 대부분의 개인전이 대관전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작가가 비용을 지불하고 평론가로부터 글을 받아야 한다. 신문이나 미술잡지 등의 매체도 매우 협소해서 웬만한 작가들의 전시회는 다뤄지지 않기에, 작가들은 전시서문을 빌어 ‘공신력 있는’ 작품 평을 듣는다. 평론가들도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현실적인 고려 때문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을 평한다면 다행이지만, “작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작가”들의 서문은 생계수단이 되므로 타협적인 선에서 써줄 때가 많다. 아직 대학에 자리 잡지 못한 한 시간강사는 “대학에서는 작가교수들이 권력이 있다. 앞으로 대학에서 강의도 소개받고 취업문제도 걸려있기 때문에 교수들의 서문요청은 거절할 수 없고, 솔직한 비평적 관점을 드러낼 수도 없는 형편이다”라고 말한다. 평론가의 지위가 많이 향상됐지만, 대학이나 미술계에선 여전히 작가들이 권력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애초에 서문을 쓰지 않는 평론가나 서문을 받지 않는 작가들이 있다. 이들은 ‘소신 있게’ 전시서문을 거절한다. 김장언 씨는 “일종의 돈 주고 글을 사는 형태라 보기 때문에, 이런 요식행위에 동참하고 싶지 않아 거절한다”라고 말한다. 현 관행을 조금이라도 고치고 싶은 마음에 작가들에게 오히려 작가노트를 쓰라고 종용한다는 것. 작가 김창겸 씨는 첫 개인전 때부터 서문을 청탁하지 않았다. 김 씨에 따르면, “돈이 매개가 되므로 형식적인 글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 글은 오히려 관객들이 내 작품을 읽는 데 방해가 된다”라는 것. 때문에 김씨는 작가노트로 대체한다. 그는 평론가의 역할은 전시회가 끝난 다음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대안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요즘 젊은 작가들이 작가노트로 대체하는 흐름이 감지되는데,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사실 작가들은 대학에서 글쓰기 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거의 없기에 쉽지 않은 일이다. 미술평론가 강선학 씨는 “작가노트는 자기작품을 미화, 신비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안이 될 수 없다”라고 본다. 오히려 “확장된 의식”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 재독 미술평론가 류병학 씨도 이런 견해에 동조하는데, 즉 “서문에서는 작가의 작업중 간과된 것들을 지적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와 평론가 모두 이 정도의 비평의식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라며 ‘확장된 의식’을 강조한다. 사진평론가 최봉림 씨는 “‘학파’가 형성돼야 한다”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는 소위 ‘홍대-서울대’ 학파가 아니다. 작가의식이나 작품성향에 따른 흐름이 미술계에도 형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개별 작가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을 뿐 어떤 논쟁이나 의식도 주된 흐름들을 이뤄내고 있지 못하다. 몇 가닥의 큰 맥들이 형성된다면 서문의 ‘시녀’가 아니라 비판적 참모 역할을 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지금 평론가들은 서문 쓰기에 주력하기 때문에 정작 작가에 대한 비평적 작업은 멈추고 있다. 작가들 역시 자기 서문이 주는 포만감에 갇혀 10년, 20년이 넘도록 비슷한 테마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전시서문은 무엇보다도 미술계의 필요한 논의나 토론을 막으며 작가작업의 발전을 막고 있기 때문에 변화가 요구되는 관행이라 할 수 있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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