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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춘천’으로 간 까닭은?
그들이 ‘춘천’으로 간 까닭은?
  • 이옥진 기자
  • 승인 2001.05.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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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03 16:48:31
바벨탑 이후 인류가 다른 언어를 갖게 된 것은 지리적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종교와 과학 사이, 과학과 인문학 사이, 문학과 철학 사이의 方言 역시 지난 세기를 한창 달궜던 주제들이다. 불통의 정점에 있던 학문은 무엇보다 현대과학이다.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했을 때, 이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열손가락을 꼽는다고 했을 정도. 문외한들을 소외시키고 전문가주의의 벽을 쌓아온 것은, 그러나 과학만은 아니었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소통불능이 도드라진 것은 지난 1959년 소설가이자 과학자였던 C.P. 스노우에 의해서였다. ‘두 문화’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스노우는 두 문화 사이의 불통이 고효율이라는 명목으로 사회적 자산의 낭비를 초래하리라는 비보를 전했던 것이다. 40여 년 전 그의 지적대로 불통은 확대되어 급기야 전쟁이라는 메타포를 얻게 되기에 이른다.

1990년대 미국 인문사회과학계에 휘몰아친 이른바 ‘과학전쟁’을 국내에서도 재현하고자 토론회가 개최됐다. 지난 27, 28일 한국과학철학회(회장 송상용 한림대 교수)가 ‘과학전쟁’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국내 과학, 과학문화학계의 학자 40명을 한 곳에 불러모았다. 지난 1998년 4, 5월 본지에 실렸던 김환석 국민대 교수(사회학과)와 오세정 서울대 교수(물리학과) 사이 4회의 논쟁이 씨앗이 되어 이번 토론회로 발아한 셈이다.

당시 김 교수는 과학기술이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근대사회의 맥락 속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사회적 구성론’을 소개하면서 논쟁을 촉발했다. 김 교수는 참여민주주의에 과학의 신화를 벗기고 ‘위험사회’를 대비하는 역할을 배당했다. 이에 오 교수는 과학기술이 근본적으로 가치중립적이라며 상대주의 과학관의 위험성을 지적했고, 근본적인 입장차이를 확인하는 것으로 논쟁은 서둘러 막을 내렸다.

지상논쟁이 불붙지 않은 이유

3년 전의 지상논쟁이 불붙지 않은 채 소강상태로 지금까지 이른 데에는 달리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이 날 ‘누구의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 불필요한 과학전쟁’이라는, 토론회의 존재이유에 제동을 거는 발표문이 그 이유를 밝히고 있었다. 애써 한자리에 모인 40명의 학자들의 발걸음을 무화시켜 버릴지 모르는 이 문제의식은 그러나 발본적인 반성으로 자리잡아갔다. 김동원 과학기술원 교수(인문사회과학부)는 이 발표문에서 우리 사회에서 과학활동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최근까지만 해도 미미했음을 지적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논쟁으로 비화할 만큼 과학과 과학문화 사이의 갈등이란 게 그다지 없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즉 “두 문화의 ‘분리’는 있었지만 ‘교류’나 ‘충돌’은 없었던” 한국의 현실을 고려한 지적이었다.

시각을 달리하지만 이런 지적은 이영희 가톨릭대 교수(사회학과)의 문제의식과도 한 맥을 나누었다. 이 교수는 ‘과학전쟁과 사회적 구성주의 : 비판적 검토’라는 발표문에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과학제도에 대한 거의 아무런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적 구성주의의 사회학에 대한 비판이 먼저 소개됨으로써 과학제도에 대한 분석이 갖는 의미가 격하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지금의 논쟁이 자칫 이제 막 살아난 국내 과학사회학의 불씨를 꺼뜨릴지 모른다고 우려를 표했다.

과학지식의 ‘신비화’ 우려

이날 대종을 이룬 논의 가운데, 과학의 과학문화학에 대한 반론은 특히 거세게 토로되었다. 이같은 항의는, 최근 생명공학 논의 가운데 실험실 과학자들에게 쏟아졌던 도덕적 비판에 대한 반론으로도 읽혔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화학과)는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에서 이런 지적이 인문사회학을 부정하거나 비하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제하며 3년 전 김환석 교수가 주장했던 과학의 탈신비화, 참여민주주의의 적용 등 몇가지 쟁점에 대해서 비판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과학지식의 ‘신비화’는 과학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동원 교수 역시 미국의 ‘과학전쟁’ 당시, 과학의 ‘사회적 구성론’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기술사회학자들조차 그들 주장의 근거를 과학 내부에서 찾아 설득력을 더했던 사실에 주목했다. 요컨대, 지금 절실한 요구는 전문적인 과학을 대중에게 알맞은 언어로 풀어서 전달할 ‘과학해설가’의 양성이지, 과학언어에 능통하지 않고 현실과학에서 비롯되지도 않은 섣부른 비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구호’가 아닌 ‘사례’가 매개물이 되기 때문에 과학자들도 이들의 책이나 논문을 읽고 같은 언어로 논쟁을 주고받을 수 있는” 현실구축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틀간에 걸친 과학자와 과학문화학자들간의 토의는 ‘전쟁’을 치르기 앞서 전력을 살피고 무엇보다 전투의 의미를 되짚어보아야 한다는 소박한 성과를 남겼다. 오늘의 팽배한 불통이 낳을 고비용 저효율의 논쟁을 가름하기 위해서라도 그 지점은 앞으로의 숙제로 새겨야 할 듯 보인다.
이옥진 기자 zo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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