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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에게 멱살 잡힌 사연
역자에게 멱살 잡힌 사연
  • 전응주 / 이제이북스
  • 승인 2004.08.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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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인의 편지

출판인의 편지

번역서의 경우, 책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역자다. 편집자의 역할은 역자에게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고, 윤문을 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번역과 편집이라는 것이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작업이고 내용을 놓고서 따지는 일이다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번역이 바라는 정도의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 채 편집자에게 넘어오는 경우, 편집자는 고심해서 결단을 내려야한다. 문제 있는 부분을 다시 번역하거나, 새로운 역자를 찾든지, 아니면 어는 정도 수위에서 교열작업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번역자와 편집자 사이에 마찰이 생기기 마련인데, 제대로 책을 내자는 뜻을 서로 잘 이해해 별다른 대립이나 갈등이 없이 작업이 이루어지면 다행이지만, 서로의 자존심 내지 자신의 의견에 대한 고집 때문에 불편한 관계에서 작업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책이 나오더라도 감정의 앙금이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며, 책의 완성도도 떨어진다.

50여종의 번역서를 내는 동안 겪은 몇 가지 경우를 말하려 한다. 먼저 <헤겔 또는 스피노자>를 번역하신 진태원 선생을 들고 싶다. 번역자의 원고가 너무나도 공을 들인 결과물이었고, 그 분야를 전공한 사람에게 외주교열자 역시 최선을 다해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기에, 편집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교정과 윤문을 하면서 번역자와 의견을 교환했으며,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사실 번역자는 번역이 끝난 후 주변의 동료들과 번역을 같이 읽고서 내용과 용어를 여러 번 고친 후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던 것이다. 이는 분명 번역자와 편집자가 이상적으로 작업을 한 경우이며, 그 이후 2종의 책을 번역하고 있다. 이와 달리, <서양 철학사>의 경우 어떤 번역자의 원고는 거칠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빠진 부분도 있으며 앞뒤의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는 상태로 넘어왔다. 빠진 부분들을 채우고 내용상 문제 있는 부분들을 고치면서 번역자와 직접 만나 내용을 고치거나 몇 번 교정지가 오고갔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별수 없이 편집진이 달라붙어 하나하나 다시 고치기 시작했고, 몇 달에 걸쳐 작업이 끝났을 때는 사실상 새로 번역한거나 진배없었다. 이 과정에서 번역자의 후배이기도한 편집자는 멱살까지 잡히는 일도 겪었다. 번역자도 편집자도 서로 책임을 회피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으며, 결국 대표인 내가 최종 책임을 지고 직접 교열 작업에 들어갔으며, 약 8개월이 소요되었다. 번역자 중 몇몇은 예전부터 꽤나 가깝게 지내던 사이인데, 이 일로 지금까지도 소원하다. 최악의 경우는 도저히 번역이라고 말할 수 없는 원문에는 없는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진 창작물로 원고를 넘긴 경우로, 고심 끝에 계약을 파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새로이 번역을 맡기게 되었다. 처음의 번역자의 이름으로 책을 낸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경우였으며, 아직 그 책은 출간되지 못하고 번역 중이다. 번역자와 편집자 둘 다 이 일을 떠올리며 몹시 불쾌해하고 있을 것이다.

번역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대체적으로 번역자는 해당 분야를 어느 정도 이상 공부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번역한 것이 최고이며, 편집자 누구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그런 아집을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편집자를 완성도 높은 책이 나오기까지의 동반자로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진정 좋은 책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나오는 번역이니만큼, 번역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번역에 임하기를 부탁드린다. 번역은 몹시 힘든 작업이다. 번역자의 노고에 비추어볼 때, 번역자가 받게 되는 보상은 분명 적다. 하지만 보상은 적지만 번역자가 보람을 느끼게 되는 일은, 편집자와 호흡을 맞춘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편집자의 행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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