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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_문화평론가들을 해부한다
진단_문화평론가들을 해부한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8.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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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아니면 풍경묘사…평론가 양산 시스템 문제

글쓰기에서 ‘문화비평’만큼 그 정체성이 흙탕물인 분야도 드물다. 글 좀 쓴다는 이들이 모두 문화비평을 쓰고 있다. 물론 서동진, 이동연, 진중권, 김종휘, 신현준 같은 전문평론가들이 있지만 이들이 ‘아마추어’들이 날뛴다고 불만을 표한 적도 없다. 내심 불만은 있겠으나 필자들이 저명한 교수이거나, 해당 분야의 마니아라면 뭐라고 하기가 좀 그럴 것이다. 아니면 문화비평이 담벼락을 높이 세우지 않는 진보적인 장르임을 자부하는 탓일까.

오늘날 문화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비평으로서의 ‘전문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글들이 많으며, 약간의 새로운 시각과 글 맛을 내는 에세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비평을 하더라도 경고성, 훈계성 주례사일 경우가 태반이며, 순환논리나 자기모순에 빠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전문비평가들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문화자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밑그림을 아주 잘 그린다. 크로키, 캐리커처, 펜화, 풍경화로 유려하게 펼쳐 보인다. 그런 다음 세 꼭지점을 갖춘 변증법적 논리의 거푸집에 넣어 돌려버린다. 그 입체영화 앞에서 대중들은 여태까지 홀려왔다. 하지만 이는 결국 풍경이고 묘사일 뿐이다. 비평을 애써 시도하는 축들도 설득력을 갖지 못한 채 ‘신경증’이 심하다는 소리를 듣고 만다. 문제가 무엇일까. 문화에 대한 글쓰기에 이토록 수많은 지면이 할애되는데도 문화비평은 왜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가.

얼마 전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는 ‘문화비평’이 정치적 패배주의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비평적 글쓰기는 변화를 지향해야 하고, 실천을 동반해야 하는데 그 변화와 실천의 현실적 불가능성 때문에 ‘고급스러운 논리’ 속에 숨고만다는 뜻이다.

문화평론가들은 대부분 ‘고급’이 아닌 ‘대중문화’와의 친밀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문화비평가들이 자양분으로 삼았던 이론적 토대인 버밍엄 학파, 맑시즘적 문화연구 등이 대중문화 연구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비평가들이 이런 이론적 단초를 아우라로만 걸친채 상업 매체 및 업계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타산에 제한된 글쓰기를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년 사이에 大漁급으로 성장한 김종휘를 보자. 그는 원래 인디음악의 대부였는데, 대안문화, 영화, 음악, 신종 현상에 대한 다양한 글과 코멘트를 쏟아내더니, 지금은영화비평들에 대한 메타비평을 일간지에 연재하고 있다. 처음엔 좀 날카롭더니 ‘뭔가’ 마찰이 있었는지 나중으로 갈수록 기자들과 영화평론가들의 견해를 종합해주는 밋밋한 글이 돼 갔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TV 진행자로 나섰다. 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진중권의 경우 미학이론, 문화비평을 하면서 정치운동 및 비평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정치비평에서의 그의 좌파적 경향은 그의 섹시한 문화비평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쓴소리를 막 해대도 상관없는 정치판에서는 소신있게 행동하면서, 왜 연성의 물렁물렁한 글들이 넘쳐나는 문화판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 하면서 섞여드는 지 모를 일이다.

이들에 비해서는 자신이 게이(Gay)임을 선포하고 게이들의 인권,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서동진, 음악에 대한 실존적 고뇌와 사회학적 관찰을 잘 섞어놓는 신현준, 축구가 좋다고 노래를 부르고 책까지 내는 정윤수가 차라리 솔직하다. 하지만 이들이 글쓰기의 대상으로 삼는 건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 피스몹(peace+mob) 같은 ‘말놀이’(?)의 배후를 읽어내는 일이다.

요즘 문화비평은 희한하게도 ‘영화’, ‘드라마’, ‘공연’ 같은 장르적 틀 내로 숨어든다. 하지만 문화평론가들은 이들 각각의 장르에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써오던 감각대로 글쓰기의 틀을 잡은 뒤 감독이나 해당 문화권에 대한 세컨더리를 약간 뒤져보고 감상문을 쓰는 것이다. 이런 틀 안에서는 아무리 ‘개성’을 내봤자 크게 모아보면 다들 비슷한 수준의 글들이 된다. 문화평론가들의 ‘월장행위’(?)를 당분간 금지해야 할 것인가. 글쓰기의 대상으로서의 문화를 ‘발견’하려는 노력보다는 주어지는 먹이를 무는 이런 소극적 존재방식은 ‘문화’에 대한 위상을 깎는다.

그 다음의 문제는 ‘하위문화’가 갖고 있는 몇가지 코드에 대한 무비판적 유통이다. 저항’, ‘넘나들기’, ‘그로테스크’, ‘소통’ 같은 것은 선언만 하면 진실이 된다. ‘메트릭스’가 출현했을 때 동서양의 온갖 철학을 짬뽕해 놓은 이 영화에 두손 들지 않은 문화평론가가 과연 있었던가. 도정일 경희대 교수(영문학)가 ‘메트릭스’를 “헐리우드의 똥”이라고 과격하게 비판한 이유도 문화주의자들의 이구동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라크전 반대시위자들이 스스로의 시위를 ‘놀이’로, 길거리 아트를 관객과의 ‘상호소통’으로 주창할 때, 평론가들은 이미 그들과 한목소리가 돼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실천이 어떻게 비평의 약화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문화비평은 이런 금기들을 단속하지 않고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계와 문화적 주체성 확보”라는 재미없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딜레마는 ‘문화비평’의 전문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다. 가령 서동진은 ‘백수, 탈근대 자본주의의 무기력자들’이란 글에서 오늘날의 백수를 “노동하는 주체에게 요구되던 일반적인 능력의 기준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판단한 자들”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사회가 ‘자발적 백수’를 양산했다는 불만이다. 그런데 ‘강요된 자발성’이란 논리가 과연 가능할까.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논리가 복잡해지고, 현상을 보더라도 ‘대표성’과 ‘보편성’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아무튼 대중문화를 견제하는 역할에서도, 사회적 흐름을 읽어내는 일에서도 문화평론가들의 시각은 좀처럼 돋보이지 못한다.

혹자는 전문성이 부족한 일간지 기자의 눈에 띄어 양성된 사이비 평론가들보다는, 문화의 각 분야에 종사하는 ‘마니아’들을 적극적인 평론가로 키워내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컴퓨터문화에 대해서는 24시간 컴퓨터를 안고 사는 사람이 글을 써야 ‘전문성’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문화비평’에 등장하는 정보들이 마니아들이 보기엔 굉장한 오류들을 담고있다는 지적으로서 경청할 만하다. 하지만 마니아들이 나선다고 양식있는 사람이 읽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글이 나올 리가 없다.

문화평론가의 본질은 역시 ‘雜學’이다. 문화를 얘기하기 위해서는 모든 분야를 골고루 꿰차는 능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화적 잡학’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이다. 각종 시각영상분야에서 ‘놀이=공부’로 전문성을 키워 그걸 사회 전반으로 확장하는 현재의 평론가 양산 시스템에선 다성성도 불꽃도 튈 수 없다. 신현준처럼 사회과학자 출신 전문 문화평론가도 나와줘야 문화비평에서 다루는 것들이 ‘뻔하지 않은 것’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는 어떤 분야의 얘기를 하더라도 독자에게 그것이 ‘문화적 차원’의 이야기라는 걸 납득시키고, 그럼으로써 문화라는 추상적 개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담론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 큰 문화는 존재하지도 않는데 작은 문화들이 돌아다니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이를 위해서 문화평론가들은 자신들의 ‘글쓰기’를 버릴 필요가 있다. 낡은 문화비평은 죽고 새로운 문화비평이 살기 위해서.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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