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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사’의 힘과 비법을 안내하는 계몽서
‘사상사’의 힘과 비법을 안내하는 계몽서
  • 임종태 서울대 교수·한국과학기술사
  • 승인 2021.03.16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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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중국정치사상사』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920쪽

‘역사적’ 접근을 통해
‘중국정치사상사’의 새로운 표준을 
세우고자 하는 야심찬 기획

 

이 책은 2017년 저자가 영어판으로 먼저 출간해 세계 학계의 호평을 받은 바 있는 책을 한국어로 증보 번역한 것이다. 참신하고 세련된 칼럼으로 널리 알려진 저자에게 기대되는 바와 달리 평범한 제목을 지닌 학술서이지만, 읽고 나면 중국정치사상사에 관한 기존 저술들과는 그 주장, 방법, 스타일 모두에서 현격히 다른 책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이 책의 새로움으로 ‘역사성’을 들고 있다. 책의 서론(1장)에서 저자는 “역사성이 좀 더 잘 구현된” 서사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곧 이 분야의 기존 통사들이 ‘사(史)’라는 이름값에 걸맞은, 충분히 역사적인 접근을 보여주지 못했음을 뜻한다. 요컨대 ‘역사다운 역사’를 추구하겠다는 일견 매우 원칙적인 선언은 중국정치사상사 서술의 표준을 근본에서 다시 세우겠다는 저자의 야심찬 기획을 드러내준다.

저자가 기존 저서들이 충분히 역사적이지 못하다고 본 이유는 중국정치사상을 역동적 변화로서보다는 어떤 초역사적 본질의 지속으로서 서술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기존 연구들은 대개 중국을 ‘동질적으로 통일된, 단일한’ 존재로 전제한 뒤, 제국 시기 말까지 전제주의적 통치로 일관했으며, ‘유교’가 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함으로써 중국정치사상의 장기적 패권을 누렸다고 보았다. 저자가 ‘본질주의’, ‘민족주의’라고 비판한 이와 같은 역사서술은 오랫동안 이 분야의 대표 도서로 널리 읽히고 있는 샤오궁취안(蕭公權)의 『중국정치사상사』에서 전형을 찾을 수 있지만, 저자가 세부 쟁점들에서 보여주듯이 중국을 역동적인 서구의 타자로 개념화해오던 서양과 일본의 학계도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중국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이에 비해 저자의 ‘역사적’ 접근이 드러내는 중국정치사상의 전개는 훨씬 다채롭고 역동적이며 창의적이다. 우선 저자는 ‘중국’을 공간·민족·문화의 측면에서 어떤 고정된 본질을 지닌 채 오랜 과거로부터 이어온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특정한 내·외적 환경에 처한 정치적 행위자들에 의해 구성된 결과물로, 역사적 환경과 행위자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재발명되고 그 의미가 재협상되어온 것으로 본다. 둘째, 저자는 국가가 사회에 침투하는 능력 측면에서, 중국의 왕조들이 특히 후기로 내려올수록 전제국가론에 어긋나는 면모를 보여주는 점에 주목한다. 진(秦)에 의해 표방된 개입주의적 국가의 이상은 당(唐) 시기를 거치며 대체로 포기되었고, 후기 제국의 통치와 운영은 인구의 규모에 비해 턱없이 작은 규모로 유지된 채 국가 관료제 바깥의 다양한 매개적 행위자가 발휘하는 ‘국가 효과’에 상당히 의존했던 것이다. 셋째, 저자는 이 책에서 바람직한 정치질서에 대해 담론한 사상가들을 훨씬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존재로 그리고 있다. 예를 들어 주희(朱熹)와 왕수인(王守仁) 같은 도학(道學) 사상가들은 국가를 넘어서는 질서와 권위의 원천(‘천리’와 ‘마음’)을 제시함으로써 국가로 환원되지 않는 엘리트의 자율적 정체성을 모색한 인물로 그려진다.

 

성인전의 한계를 넘어선 통시대적 서사

 

이 책은 중국정치사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 또한 새롭다. 중국정치사상사를 고대에 확립된 어떤 본질의 변주로 묘사한 기왕의 서술들은 대체로 공자로부터 마오쩌둥에 이르는 위대한 인물들의 사상 계보를 정리한 성인전(聖人傳)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에 비해 이 책은 중국정치사상의 역동적 변화를 잘 대변하는 열 가지 주제를 선정해 서사를 재구성한다. 공자가 추구한 ‘계몽된 관습 공동체’(2장)로부터, 제자백가가 제각기 논의한 ‘정치 사회’(3장), 남송의 도학자들이 건설한 ‘형이상학 공화국’(6장) 등의 주제는 중국의 정치 또는 정치사상에서 시기별로 일어난 두드러진 혁신과 변화, 그리고 그와 연결된 이론적 쟁점을 대변함으로써, 이들이 모여 하나의 일관되고 흥미로운 통시대적 서사를 구성한다.

주목할 것은 이 책이 다른 어떤 중국정치사상사 서술보다 정치사, 사회사 관련 쟁점을 적극 논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사가 특정 정치사상을 둘러싼 역사적 환경을 알려주고, 사회사가 사상의 발화자들인 중국 엘리트들의 사회적 존재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런 논의는 ‘역사성을 구현’한 정치사상사의 필수 요건인 듯하지만, 저자에게는 역으로 창의적 행위자로서 사상가들의 실천에 주목하는 사상사가 어떻게 정치·사회사의 주요 쟁점에 독자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 보여주려는 전략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중국 엘리트의 성격과 국가와 사회의 관계 문제에서 정치·사회사적 접근이 봉착한 이론적 난국에 대해 저자가 사상사적 방법을 대안적 해결책으로 제시하려 했던 ‘형이상학 공화국’(6장)과 ‘시민사회 혹은 정체(政體)?’(9장)의 내용은 이 책의 여러 흥미진진한 논의 중에서도 단연 백미로 꼽을 수 있다.


예술작품에 숨겨진 정치적 기획


저자는 한국어판에서 책의 분량을 두 배 이상 확대했고, 그 늘어난 지면에 사상사의 힘과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다채로운 읽을거리, 볼거리를 배치했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중국사상을 사회과학 이론과 연관시켜 논의하는 생산적 방식을 접할 수 있으며, 정통적인 사상문헌은 물론 소설, 시, 회화 같은 예술작품에 숨겨진 정치적 기획을 읽어내는 창의적인 독해의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단순히 중국(정치)사상사를 넘어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을 지닌 폭넓은 독자들에게 저자가 닦아온 사상사의 ‘비법’을 안내하는 계몽서라는 인상을 준다. 이 책에서 제시한 통찰과 방법을 적용해볼 대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저자도 머리말에 희망했듯, 한국정치사상사일 것이다. 이 책이 중국정치사상에 관한 우리의 익숙한 통념을 바꾸고 있듯, 비슷한 접근법으로 쓰일 한국정치사상사가 어떤 낯설고 흥미진진한 면모를 드러낼지 궁금해진다.

 

 

 

임종태

〈서울대 교수·한국과학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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