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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에서 논쟁으로, 기본소득 논의의 재구성
정쟁에서 논쟁으로, 기본소득 논의의 재구성
  • 박강수
  • 승인 2021.03.1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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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심포지엄 ‘기본소득의 사회과학적 이해’

1986년 유럽에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가 발족했고 여기에 한국이 합류한 것은 2010년의 일이다. 다시 10년의 시간을 건너 기본소득이 한국사회의 정책 화두로 떠올랐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꾸준히 드라이브를 걸어 왔고 김경수 경남지사, 정세균 국무총리,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 김세연 전 미래통합당 의원 등이 의견을 얹으며 논쟁을 키웠다. 다만 여전히 ‘정치공학적 입씨름’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이에 학계가 나섰다.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은 지난 5일 서울대 사회대 내 8개 학과 교수진이 참여한 「기본소득의 사회과학적 이해」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지난 6개월여간 정치학, 심리학, 경제학, 사회복지학, 언론정보학, 인류학, 지리학, 사회학 등 각 전공에서 진행된 기본소득 관련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논평자로 참여한 채수홍 서울대 교수(인류학과)는 “각 분과에서 어떤 문제의식을 갖는지 서로 몰랐는데 의미 있는 첫발을 뗐다. (학술발표가) 문제제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 진행됐으면 한다”고 바람을 밝혔다. <교수신문>이 8편 발표의 주요 내용을 정리했다.

 

 

 

기본소득은 누구를 만족시키는 기획인가

정치외교학부 강원택 교수는 ‘복지 제도의 정치학’을 꺼내 들며 기본소득에 커다란 정치적 물음표를 그렸다. 새로운 복지 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수혜를 보는 사람들과 비용을 주로 부담하는 집단, 둘 사이 합의를 주도하는 정치 세력 사이 이해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강 교수는 2차 대전 전후의 스웨덴을 예로 든다. 조직화된 노동계층이라는 뚜렷한 정체성 집단이 추진력을 제공했고, 비용(세금)을 대는 대가로 중산층은 체제 안정을 보장받았다. 합의를 주도한 사민당은 지지층을 강화하며 장기집권의 기반을 다졌다. 오늘날 복지선진국 스웨덴을 만들어낸 타협의 원리다.

반면 기본소득의 경우는 이 정치적 동선이 불분명하다고 강 교수는 분석한다. “계급 합의의 주체를 찾기 어려워 누구를 위한 복지인지 명확하지 않고, 보편적 무조건 지급이기에 정치권 입장에서도 대상을 차별화해 지지를 얻기 어려운데, 증세를 통한 재원 마련은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이어서 강 교수는 “결국 남는 방안은 포퓰리즘 전략”이 되기 쉽고 이는 곧 “사회적 분열로 갈 수밖에 없다”고 회의적 전망을 표했다.

 

 

우리는 우리가 기본소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른다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기본소득 여론의 허점’을 지적한다. “일반인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가 정확하게 측정되지 않고 있어, 기본소득 논의가 너무 정파적, 피상적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기본소득의 논점을 둘로 나눈다. 첫 번째, 기본소득은 실현 가능한가. 두 번째, 기본소득의 취지는 바람직한가. 전자에 부정적이더라도 후자는 긍정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단순히 ‘기본소득 찬반’을 묻는 질문에는 이런 미묘한 지점들이 측정되지 않는다.

이어서 최 교수는 “기본소득에 대한 실제 논쟁의 양상은 구체적 액수, 빈도와 기간, 대상 한정 여부, 기본 복지 제도와 관계 등 세분화된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명세화한 태도 측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갈등이 과장되고 일반인의 참여가 어려워진 기본소득 논의”를 체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오히려 후생을 감소시킬 수 있다

경제학부 장용성 교수는 김선빈 연세대 교수, 한종석 아주대 교수와 공동으로 진행한 경제 시뮬레이션 연구 결과를 내놨다. 세율, 자본과 노동 공급량, 분배 지표 등 영역에서 기본소득 도입이 가져올 경제적 효과를 추정하는 작업이다. 만 25세 이상 국민 1인당 연 360만원을 지급한다고 가정하면 소요되는 재정은 141조원이다. 이 재원을 소득세율 인상, 자본소득세율 인상 등 총 다섯 가지 방식으로 마련하는 각각의 경우에 맞춰 결과를 추산했다.

시나리오의 결론은 다소 암울하다. 소득세율은 17.6%p나 오르고, 총자본과 총유효노동력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총생산도 줄어든다. 재분배 효과도 불투명하다. 세전소득 기준 지니 계수는 오히려 증가할 확률이 높다. 여가가 증가하기보다 소비가 감소해 사회적 후생 수준은 크게 개선되지 않거나 오히려 악화된다. 장 교수는 “(5개 시나리오 중) 자본에 세금 매기는 경우 후생이 가장 나빠진다”며 “자본이 장기적으로 줄어들면 노동자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재원 마련에 대한 다섯 가지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기본소득 도입 효과를 추산한 결과표. 대부분 시나리오에서 총생산, 고용률이 감소하고 근로소득세율은 오른다. 특히 자본세을 인상하는 경우에 부정적 효과가 가장 크게 계산됐다. 출처=장용성 서울대 교수

 

 

복지국가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사회복지학과 안상훈 교수는 ‘기존 복지국가의 대체재’라는 측면에서 기본소득을 점검하고 대안을 모색했다. 안 교수는 “기존 복지국가는 노동시장 참여를 조건으로 사회보험 등 복지 시스템을 제공하는 수정 자본주의 프로젝트”라고 풀이하며 ‘탈노동’을 앞세운 기본소득과 상충하는 지점을 짚었다. 안 교수는 “기본소득이 복지국가를 대체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기본소득이 논의되는 곳은 대부분 저복지, 개도국들이고 독일, 북유럽 등 사민주의 복지국가들은 무관심하다”고 말했다.

대신 안 교수는 복지국가 모델을 다시 한번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안 교수는 “복지지출이 늘수록 성장률, 고용률이 떨어진다는 그래프가 있는데, 이를 ‘사회서비스복지’와 ‘현금복지’로 나눠서 보면 효과가 정반대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현금복지는 성장과 고용에 악영향을 미치지만 서비스복지 지출은 오히려 실업률을 낮춘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돌봄 노동 등 사회 서비스에 돈을 쓰면 대부분 인건비로 투입돼 고용 유발 효과가 크다”면서 “서비스복지야말로 한국 복지 정책의 방향”이라고 주장했다.

 

 

담론이 선거정치에 포섭되다

언론정보학과 한규섭 교수는 언론 보도에 등장한 ‘기본소득’의 패턴을 조사해 담론 지형을 추정했다. 한 교수는 “1992년 이후 기본소득이라는 단어가 본문에 한 번이라도 등장한 기사는 3만 6천 건 정도로 적은 편”이라고 설명하며 “사실상 사회적 담론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결론을 냈다. 국회회의록의 경우는 제헌국회 이후 모든 기록을 통틀어서 81회 언급 빈도를 보였다. 제도권에서는 논의된 적이 없다고 봐야 한다.

데이터는 제한적이지만 몇 번의 변곡점은 파악된다. 언론 지면에서 기본소득 언급은 2016년과 2020년, 크게 두 번 폭증한다. 함께 거론된 키워드는 각각 ‘김종인’, ‘이재명’이었다. 팬데믹과 재난지원금으로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박원순, 김경수, 이낙연 등 정치인 이름이 더 많이 등장한다. 반면 정책의 핵심 쟁점인 ‘재원’, ‘재정’ 등은 상대적으로 거의 언급되지 않아 “지금까지의 기본소득 담론은 선거정치의 도구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한 교수는 분석했다.

 

 

출처=한규섭 서울대 교수
기본소득에 대한 언론의 보도 추이를 분석한 그래프다. 네이버와 제휴를 맺은 언론사 기사를 대상으로 1992년부터 본문에 ‘기본소득’이 한번이라도 언급된 기사를 모두 셌다. 2016년부터 언급량이 늘기 시작해 2017년에 한 차례 정점을 찍고 지난해 2만 건을 훌쩍 넘어 폭증했다. 올해는 두 달 정도 지났을 뿐인데도 벌써 5천 건 가까이 집계됐다. 출처=한규섭 서울대 교수

 

 

소유에서 공유로… 새로운 사회계약의 가능성

인류학과 이승철 교수는 공유에 기반한 사회계약의 관점에서 기본소득을 일종의 사회 운동으로 접근했다. 이 교수는 “조건 없는 현금 지급”이 아니라 “공유부에 대한 배당”으로 기본소득을 파악할 때 “기존 체제를 극복하려는 사회운동의 의미가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즉, 같은 기본소득을 지급하더라도 개인의 소유를 늘려주는 제도가 아니라, 사회적 공유부에서 각자의 몫을 분배하는 제도로 디자인할 때 혁신적 성격이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그간 사회운동이 신자유주의에 맞서 기존 사회계약을 방어하려는 기획이었다면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의 조건들을 받아들이면서 여기에 기반해 새로운 사회계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고 짚었다. 이어서 “인류학적으로 보면 ‘사적 소유’는 역사 속에서 특수한 형태였고 실제로는 다양한 공유 형태가 존재해 왔다”며 “공동 소유와 분배는 기본소득과 인류학적 논의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풀어냈다.

 

 

핵심은 소득 불평등보다 지역 불평등

지리학과 김용창 교수는 “오늘날 불로소득자본주의의 대안은 기본소득보다는 ‘보편적 서비스 체제’”라는 주장을 폈다. 김 교수는 “한국은 개천에서 용이 안 나는 것이 아니라 개천이 다 말라버린 상황”이라며 “단순히 소득을 증가시키는 전략만으로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부동산 불로소득의 82%가 수도권에서 발생하고 고령인구 비율, 좋은 일자리 분포도, 보건의료서비스 접근성 등에서 지역 격차가 점점 심해지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 양극화 해소는 어렵다는 진단이다.

김 교수는 “배타적 행정구역이 아닌 실제 사람들의 동선에 기반한 공공서비스 제공, 주민등록 다지역 거주제 개편, 공공 와이파이 확장” 등 구체적인 정책을 예로 들면서 “소득을 보전 받는 일을 넘어서 보건의료, 교육, 주거, 교통, 정보 등 보편적 기본서비스(UBS)를 살고 있는 지역에 상관없이 균등하게 보장받는 것이 더 효과적인 복지 정책”이라고 말했다.

 

 

소득에서 해방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사회학과 권현지 교수는 일자리와 노동에 대한 기본소득의 입장과 한계, 대안을 따졌다. 권 교수는 기본소득에 대해 “일자리의 질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문제의식을 보여준다”고 평가하면서도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노동을 필요한 만큼 공급하는 등 전체 노동 시장 구조와 서비스 개선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택의 자유가 향상되면 노동시장 수급도 원활해질 것이라는 기대는 유토피아적”이라는 비판이다.

권 교수는 대안으로 ‘일자리보장제(Job Guarantee)’를 제안한다. 일자리보장제는 “국가가 최종 고용자가 되어 사회적 가치가 있는 노동, 필수노동 등을 특별 관리하고 사람들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제도”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일을 국가가 적극적으로 만들어내고 사람들을 고용한다. 다만 이 경우에도 “국가가 가치 있는 노동을 판단, 설계, 배치할 능력을 갖고 있는가”하는 문제가 남는다고 권 교수는 지적한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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