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22:45 (금)
우리시대 비평을 때리는 언덕의 목소리
우리시대 비평을 때리는 언덕의 목소리
  • 손종업 선문대
  • 승인 2004.07.1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간리뷰 : 『비평의 길』(이성욱 지음, 문학동네 刊, 2004, 550쪽)

손종업 / 선문대·국문학

요즘 대학생들은 좀처럼 책을 읽으려하지 않는다. 레포트는 인터넷을 통해 指紋도 없이 무한증식되며 논문은 표절에 의해 잠식된다. 교수들도 어쩔 수 없이 그 현실을 수긍해버린다. 사이버상의 문서들은 익명의 다중들에 의해 대량으로 생산되고 무차별적으로 유포됐다가 빠르게 폐기된다. 문학조차가 그 흐름 속에 휩쓸려버린다. 아마도 문학이 위기라면 그것은 문학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문학이 그 이름 속에 지녔던 그 모든 후광과 힘을 잃은 채 망각되기 때문이리라. 한 비평가가 작금의 문단을 두고 ‘뛰어난 군소작가들의 시대’라고 부를 때 비평조차가 그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이 마음 아프지 않을 수 없다.

한때 비평의 시대로 불리던 시대가 있었다. 이 세계의 암흑과 인간들의 욕망이 과학적 사유에 의해 남김없이 해명될 것 같았는데 그만큼 치기 어린 시대이기도 했다. 그런 시대는 그야말로 잔치가 끝나듯이 끝나버렸다. 그 시대의 말석에 앉았으며 그 어이없는 몰락을 온몸으로 앓다가 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비평가가 있다. 그가 바로 이성욱이다. 그의 비평집 '비평의 길'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 시대의 비평이 그에게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뼈아픈 자책에 빠져든다. 비평가로서의 그의 모습은 이인화의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을 통해서 우리에게 각인된다. 그러나 그의 비평이 지니는 파장은 이 논쟁을 뛰어넘는다. 사실 그 논쟁은 포스트 모던한 세계와의 開戰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끝까지 명석판명함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안개처럼 밀려드는 새로운 시대의 불투명성을 그저 외면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모든 문화적 징후들의 새로움에 자신을 열어둔다. 이제 문학은 키치와 대중문화, 여러 매체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곡예가 위험하다고 해서, 그래서 그것을 거부한다 해도 문학이 돌아갈 수 있는 안전지대는 이제 더 이상 없다. 아니 스스로 안전지대를 지워가는 것이 문학의 신생을 보장하는 일일는지 모른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기존의 리얼리즘 문법이 현실을 억압한 것은 아니었는지 끊임없이 되묻는다. 물론 개인의 내면성에 집착하는 신세대문학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기억엔 80년 광주가 불도장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으며 그의 눈앞에는 속악한 현실이 키치라는 이름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 비평집에서 그가 어떤 비평적 ‘내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결코 극단의 사상가라 할 수 없다. 다만 그는 자신의 비평적 사유의 스펙트럼을 최대한 확장시켰으며 그 이질적인 것들의 내홍을 견디는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끊임없이 ‘다시 현실 속으로’를 외친다. 돌이켜보건대 이 시대의 젊은 작가들은 그의 주문에 좀더 귀를 기울여야 했던 게 아닐까.

이 책 어느 곳에선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나온 길은 훤히 보인다. 더구나 언덕 위에 서면 다른 길도 있었다는 사실을 다 알 수 있다.” 이렇게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언덕 위에 세운 고도의 비평가였다. 그곳에서 그는 우리 문학의 도정을 짚어보며 또 다른 길들에 대해 사유한다. 창공에 빛나는 별들이 사라진 곳에서 비평가는 스스로 작은 언덕이 되기를 희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세계는 미궁과 같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해선 안 되는 것, 그것은 늘 언덕 너머로 희미하게 숨어버리는 희망이며 그것을 향한 시지프스적 실천이라고.

필자는 중앙대에서 '1950년대 한국 장편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기원 소설에 나타난 폭력의 재현양상', '표본실의 해부학: 한국 자연주의 담론 속의 식민주의' 등의 논문이, '탈식민의 텍스트, 저항과 해방의 담론' 등의 저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