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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주의로는 쌀 산업 구원할 수 없다
보호주의로는 쌀 산업 구원할 수 없다
  • 이용기 영남대
  • 승인 2004.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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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서평 : 『한국의 쌀정책』(김병택 지음, 한울 刊, 2004, 542쪽)

이 책은 한국의 쌀 정책과 관련해 그 전개 과정과 앞으로의 정책 방향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쌀 정책이 지금까지 어떻게 진행돼 왔는지에 관한 역사적·사실적 서술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쌀 정책 논의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WTO 체제 출범 이후 급변하는 세계 농업 환경 속에서 한국 쌀 정책을 어떻게 정립해 나갈 것인지가 중요한 이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향후 쌀 농업의 중심 과제로 농가소득지지, 국내자급유지, 공급과잉 해소를 통한 수급균형, 그리고 국제경쟁력 향상 등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시장기능 강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쌀 산업에 대한 보호주의적 경향이 엿보인다. 쌀의 국내자급 달성과 쌀 생산을 통한 소득지지가 21세기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올바른 정책방향인지는 의문이다.

이제 쌀을 포함한 우리의 농업정책 패러다임은 변해야 한다. WTO 체제에서의 농업정책은 시장경제원리의 기본 틀 내에서 직접지불과 정부서비스가 중심이 되는 정책수단을 요구하고 있다. 쌀 정책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국내자급 달성을 미래 농업정책의 중심적 위치에 두고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식량안보 논리에 근거한다. 식량안보의 확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국내자급이 달성돼야만 식량안보가 확보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쌀 생산은 토지용역비가 생산비의 절반을 차지하는 비용구조로 국제경쟁력 향상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쌀 산업에 국내자급 달성을 위해 지지정책이 지속된다면 이는 우리 농업과 농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쌀 산업 보호의 또 다른 논거로 쌀이 농업소득과 생산 농가수 측면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쌀 산업에 시장경제원리와 경쟁원리가 지배돼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지정책을 통해 농가소득의 쌀 의존도를 심화시킬수록 쌀 산업의 경쟁력 향상의 한계로 농업·농촌 발전 속도는 더욱 늦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토지집약적 쌀 중심 농업구조에서 기술·지식집약형의 고부가가치 농업생산구조로 전환돼야 한다. 쌀의 국내자급을 강조할수록, 그리고 이를 위하여 쌀 산업에 시장원리 도입을 지연시킬수록 이런 구조전환은 어려워질 것이다. 농가소득의 향상은 쌀 농업 지지와 시장간섭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런 효율적 생산구조로의 전환과 직접지불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국내자급에 집착하기보다는 식량안보와 효율성, 그리고 쌀 농업의 다원적·공익적 기능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최적의 쌀 생산수준을 찾아내는 일이 더 중요할 것이다. 일정 수준의 쌀 생산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특히 농촌 지역사회 유지를 포함하는 국토의 균형적 발전과 효율적 이용에 있다. 이런 외부효과에 의한 시장실패(market failure) 교정을 위한 범위 내에서 정책간섭의 정당성을 찾아야 한다. 현행 약정수매제는 이런 맥락에서 재검토되어져야 한다. 그러면 공급과잉에 따른 수급 불균형 문제도 인위적 생산조정 없이 시장메커니즘에 의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또 흥미롭게도 약정수매제에 의한 감축 대상 국내지지인 '총AMS'(1995년 2조 1,800억 원)를 시종 '보조'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개념상 '보조'와는 명백히 다르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단 이 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용어 사용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농업부문이 엄청난 '보조'를 받고 있다는 사회적 비난을 자초하고 있음은 아이러니다.

직접지불은 가격지지를 대신해 농업생산자를 대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21세기 중요 정책수단이다. 저자는 직접지불제 도입의 필요성을 시장지향성 외에 식량안보와 국내자급 목적을 들고 있지만 이 또한 동의하기 어렵다. 본래적 의미의 직접지불은 생산 또는 시장 중립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농업협정'(Agreement on Agriculture)에서도 식량안보는 직접지불이 아닌 정부서비스에 해당하는 공공비축제도를 통해 달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무역정책과 관련한 논의는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기서도 쌀 산업 보호론은 계속된다. DDA 협상에서 마땅히 개도국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거나, 쌀 재협상에서 관세화 유예 연장을 최상의 방안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식량 순수입국으로서의 한국 정서에 부응하는 일반론적 주장이긴 하지만 보다 더 냉철한 분석과 이론적 검토를 통한 타당한 논거가 제시돼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보호정책이 곧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오해다. 국제경쟁력은 경쟁하는 연습을 통해서 길러질 수 있다. 21세기 우리의 쌀 농업정책 방향은 기본적으로는 시장원리에 충실하면서도, 전체 농업·농촌의 장기적 발전과 나아가 국토의 균형적 발전이란 큰 틀 속에서 재정립돼져야 한다.

50여년 간의 방대한 쌀 정책관련 자료를 정리하는 일은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적 기술에 치중하기보다는 냉철한 평가와 비판, 그리고 좀더 분석적·이론적으로 깊이 있게 접근했더라면 한층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일리노이대에서 '한국 쌀시장에서의 가격안정화정책에 관한 동태적 후생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AMS 감축과 쌀 수매정책의 효과', '농업의 다원적 기능과 무역자유화' 등의 논문이, '국제농업통상론'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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