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그림이 포근함을 느끼게 하는 에반 티 프리처드의 '시계가 없는 나라'(강자모 옮김, 동아시아 刊)는 인디언版 '마음을 열어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인디언 언어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라는 부제목대로 인디언의 말에 담긴 지혜를 예화와 함께 들려준다. 특히, 알곤킨어와 미크맥어에서 북미 원주민의 지혜를 추출한다. 저자가 생활에서 원주민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와 그분들의 행동을 관찰한 것이 책의 바탕을 이룬다. 저자는 미크맥 부족의 후손이다.
산뜻한 표지와 깔끔한 본문
미크맥어 어휘인 '노고모크'에는 이 책의 주제와 내용이 함축돼 있다. '노고모크'는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모두가 나의 형제'라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는 "원주민들은 부족들이 이 세상에서 각각 수행해야 할 역할이 따로 있지만 모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한다"라고 덧붙인다.
'노고모크'의 형제애는 비단 북미 원주민들에게만 국한하지 않는다. 땅을 근거로 삼는 모든 세계인과 함께 한다. 저자가 인디언의 말에 담긴 지혜를 풀이하면서 종종 옛 인도와 중국의 사상을 끌어들이는 비교문화적인 방식을 취하는 것도 '노고모크'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권의 우열을 가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알곤킨 부족의 믿음체계보다 더 나은 것은 발견하지 못했노라 단언한다.
아무튼 저자는 한때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노고모크'적인 삶의 태도를 견지한 점을 알아야 하고, 이러한 세계문화의 틀에서 북미 원주민 문화를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생태적이며 전체론적이고 입체적이다. 그것은 非線型적이며 비시간적이다."
이 책은 번역자가 오히예사가 남긴 여러 권의 저서에서 주요 부분을 옮겨 엮은 편역서다. 또한, 사진이 들어가고 옮겨 엮은 형식적 측면에서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과 틱낫한의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의 계보를 잇는 편역자의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책은 개명한 인디언의 자전적 기록의 성격이 짙다. 그런데 편역자의 의도가 반영된 때문인지 개명 이후보다는 이른바 '문명 세계'로 나오기 이전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오히예사는 북미 원주민의 지혜를 다룬 대목에서 자신의 조상이 발명한 물건들을 '얼굴 흰 침략자들'이 매우 유용하게 사용했다고 말한다. 나무껍질로 만든 카누, 눈신발, 가죽으로 만든 모카신, 백인 군대 막사의 모델이 된 티피, 극지방 탐험가의 비상식량으로 사용된 열매 등을 섞어 만든 페미컨, 당단풍나무 수액으로 설탕을 만드는 기술, 옥수수 재배 등이 그런 것들이다.
오히예사는 開明하면서 改名하기도 한다. 최초의 인디언 출신 서양 의사인 찰스 이스트먼이 바로 그다. 수우 족 출신으로 16살까지 할머니와 삼촌의 보호 아래 인디언 전통에 따라 성장한 오히예사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백인 교육을 받는다. 보스턴 의대를 나와 의사로 활동하면서 보이스카웃 창설에 관여하기도 했다. 백인 사회에서 기반을 잡은 그는 '승리자'라는 뜻의 본명을 되찾는다.
'내 이름은 용감한 새'(신홍민 옮김, 두레 刊)와 '나의 피는 나의 꿈속을 가로지르는 강물과 같다'(조병준 옮김, 푸른숲 刊)는 오늘을 사는 인디언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자전적 기록이다. 두 책의 주인공인 '메리 용감한 새'와 '나스디지'는 각기 수우 족과 나바호 족 출신이다. 출신과 성별은 달라도 두 사람의 인생 역정은 기구하기 짝이 없다. 열 살 무렵부터 심지어는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술에 찌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비판적 접근도 필요해
영국의 과학저술가 매트 리들리는 '이타적 유전자'에서 생태주의 선언으로 받아들여지는 시애틀 추장이 1854년에 미국의 워싱턴 주지사에게 보낸 담화문의 내용이 누군가가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북미 원주민의 삶을 이상화하는 태도를 되돌아보게 한다.
또,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사는 원주민의 후예들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폰티악'과 '붉은 윗도리'가 연설에서 언급한 대로 원주민에게 독한 술맛을 들인 1차적 책임은 백인들에게 지울 수 있어도 오늘의 피폐한 삶까지 전적으로 그들 탓으로 돌리기에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