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세봉 연구교수(부산대 · 역사학)
이전부터 일년 중에서도 5?6월은 통상 큰 학술대회가 비교적 많이 열리는 편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근래에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연구과제 중간발표도 이 무렵에 열리는 경우가 많아 知的으로 포식하기에 좋은 계절이 됐다. 기초학문육성지원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2년이 되는 올해는 연구결과가 산출되는 시기이기도 해서 기초학문 분야에서 실로 다양한 수확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학진 연구과제 중간발표회가 지적 재미나 긴장 혹은 흥분은 사라지고 벌써 형식적인 행사로 변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학진 중간과제 발표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학회의 발표장 전반에 관통되고 있는 일이기는 하다. 현재와 같은 학회의 발표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도 가끔 있었지만, 여전히 변함이 없다. 아니 변함없는 사실을 전혀 이상하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것이 문제이다.
교수들은 아직도 사회에 대한 계몽자 역할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지만 정작 학계 내부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학진 과제 중간발표회는 지원을 받은 연구발표인 만큼 판을 바꾸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우선은 발표장의 공간배치를 바꿀 필요가 있다. 한두 명이 단상에서 발표하고, 발표?토론자와 청중이 마주하는 공간은 알게 모르게 무겁고 공식적인, 그래서 딱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러한 발표장은 상호 의사소통의 공간이 되기 어렵다. 원탁형이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다.
대신에 책상을 ㄷ자 혹은 ㅠ자로 배치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학생들의 참여가 예상된다면 3면의 벽을 따라 의자를 빙둘러 두게 되면 적지 않은 인원이 참석할 수 있다. 발표자와 청중이 서로 약간 비껴선 각도는 쉽게 말문이 터지고 대화를 보다 용이하게 해준다. 근래 내가 참석한 상하이와 타이베이에서의 발표장에서 이러한 공간배치를 자주 볼 수 있어서, 이웃 나라에서는 벌써 정착돼 있는가 싶다.
다음으로는 발표형식이다. 발표장은 각주까지 달아 완성된 초고를 읽어가는 경우가 많다. 발표는 짧고 토론은 길어서 재미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는 발표내용만큼이나 발표 그 자체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인문학, 기초학문의 위기는 지식의 생산 이상으로 유통에 기인한다면, 유통의 중요한 환절인 발표장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알아듣기 쉽고 요령있게 자신의 연구를 청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여기에는 각자 나름의 방법이 있겠는데, 어쩌면 손으로 적은 서너 장의 요약문으로 발표하던 근 20년전의 옛날로 되돌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발표장은 읽는 곳이 아니라 말하는 곳이 돼야 한다.
우리 학계에서 가장 빈곤한 것은 종합력이다. 공동연구는 하나의 대주제 아래에 여러 전공자가 개별 연구를 분담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합토론이란 이름뿐이고 개별 논문에 대한 질문 토론이 반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동연구의 발표장이 아니라 사실상 개별연구의 발표장에 불과한 것이다. 공동연구란 개별 논문이 종합돼 하나의 유기적인 그림이 그려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란 어렵다.
이러한 종합력에는 연구책임자(혹은 사회자)의 역할이 막중하다. 학진은 연구책임자의 역할을 개인논문의 작성이 아니라 공동연구를 종합하는 몫에 할당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연구결과의 평가에서 연구결과의 종합에 대하여 평가하지 않는다면, 공동연구라는 구색을 갖춘 개별연구의 단순집합에 그치기 십상이다.
인문학을 비롯한 기초학문에의 지원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발표회가 관행적인 행사로 전락된다면, 기초학문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를 외칠 자격조차도 없어질지 모른다. 이대로 간다면 공적자금에 관한 도덕적 해이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