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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왜곡과 우리안의 극우파/ 임헌영 중앙대 교수(국문학)
교과서 왜곡과 우리안의 극우파/ 임헌영 중앙대 교수(국문학)
  • 임헌영 중앙대
  • 승인 2001.04.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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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평

언제나 그랬었고 지금도 그러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봄이 오면 벚꽃이 피듯이, 여름이면 태풍과 폭우가 내리듯이 일본의 ‘망언’과 역사 왜곡에 의한 아시아 침략의 야욕은 홍두깨처럼 나타날 것이다.

征韓論 이후 역사 교과서 파동까지 일관된 大和魂의 발로는 확고한 뿌리와 탄탄한 줄기와 무성한 잎과 꽃들로 치장된 일본적 파시즘이라는 천황주의 극우 이데올로기선상에 버티고서 아시아 전역을 배회하며 둥지를 틀고자 틈새를 노리고 있다.

소련 동구권 분해와 걸프전으로 미국의 지구 지배체제가 확립된 때에 발맞춰 세계사는 급격히 보수·우경화로 치달아 국민국가의 이기주의가 제2의 제국주의 시대를 맞은 듯이 찰스 다윈적인 민족 적자생존의 단계로 들어섰고, 이에 일본 극우파는 장기적인 경제 불황의 출구로 제2차대전 이전의 팽창주의에 대한 향수 어린 망상으로 그 출구를 모색, 그 첫 시도가 교과서 개정으로 나타났다.

역사는 반복하는가. 그래서 ‘개화’란 구호가 20세기 초기에 미망 속의 약소국을 식민지로 유도했듯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란 유혹이 21세기의 후(중)진국으로 하여금 경제적인 예속화로 귀착시킬 것인가. 일본 극우파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역사 교과서는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한 첫 걸음이자 21세기적인 ‘정한론’이다. 단순한 교과서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이 터진 뒤에 목소리만 높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은 옳았을까. 진정한 민족 주체성을 지닌 인사들에게 기회주의적인 매명가들이 합세하여 돼먹지도 않은 엉터리 진단서와 처방전을 남발하고는 세태 따라 슬며시 조신하는 몸사리기가 반복되어 왔다. 이 치욕스런 소극적 방어본능의 시지포스적인 헛수고를 극복하려면 이번에야말로 근본적인 대응책을 내놔야 할 판이다.

일본 국수주의가 거론될 때마다 빠지지 않는 메뉴에 독일 참회론이 있다. 독일은 양심적인 국가권력이며 일본은 야만과 우둔의 나라인양 동네북처럼 쳐댄다. 과연 그럴까. 너무 단순한 비교다. 독일 극우파의 야만은 일본에 못지 않으며, 동서독 통일 과정에서 보여준 비인도적인 처사는 일본과 옛 형제지간에 다름 아님을 보여준다. 문제는 국민성이나 국가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차이일 것이다. 극우파는 독일, 일본뿐이 아니라 미국이나 한국도 같을 따름인데 독일은 다행히 극우파가 지배계급이 아니었을 뿐이다.

독일의 참회는 유럽 여러 나라들이 과거를 청산하지 않으면 함께 할 수 없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나온 인도주의 이념의 열매에 다름 아니다. 프랑스의 친독 인사 심판이 얼마나 냉혹했던가는 세계사의 교훈이 되고 있으며, 지금도 나치 전범을 체포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독일이 취할 길은 참회밖에 없었다.
아시아는 어땠는가. 중국을 비롯한 몇 나라를 예외로 한다면 제2차대전 후 아시아를 지배해온 것은 친일파래도 지나칠 게 없을 지경이다. 저쪽에서는 나치 경력이 체포의 빌미인데 이쪽은 출세의 경력이다. 저쪽은 나치 전력이 노출되면 공직에서 파면 당하나 이쪽은 친일파를 발굴 혹은 비판하면 파면 혹은 학대 당했다.
일본 교과서 파동은 우리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추는 거울에 다름 아니다. 이미 우리는 일본의 극우파 문학예술을 ‘순수예술’이라는 허울로 뿌리 내리게 해줬고, 그 반대로 반전, 반천황제 문화와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불온’이랍시고 담장을 높이 쌓아오지 않았던가. 우리 속에 일본식 극우파는 과연 없을까.

극우파는 대개 국수주의와 혈맹관계인데 우리의 극우파는 노근리 미군 학살사건을 전쟁 중에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할 정도로 관대하여 일제잔재 청산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강대국 이익을 옹호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남북화해 보다는 부시 미국대통령의 긴장 조성을 오히려 선호하는 게 우리의 극우 이데올로기이고 보면 그 근본 바탕은 독일이나 일본 혹은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다를 바 없다.

일본 신자유주의가 진솔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준 교과서 파동은 아시아인 모두에게 치욕적인 자화상이다. 이제야말로 제2차대전의 잔재를 청산하지 않을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우리는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일본에게 독일을 본받으라고 하기 전에 우리(아시아)가 프랑스(유럽)를 스승으로 삼아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경제적인 OECD가맹이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정신적인 소아병적 우익 이데올로기가 수치스러운 것이다.

우리 자신의 변화 없이 외교적인 술수만으로 이 문제에 대처하려는 것은 일본의 교묘한 우익 이데올로기 침략에 차라리 우리를 내맡기는 결과밖에 안될 것이다. 설사 교과서를 고친대도 그보다 훨씬 강력한 호소력과 전파력을 지닌 천황제 극우 이데올로기가 문화예술의 형태로 침습하기 때문이다. 이게 어찌 교과서만의 문제인가. 어느새 언론매체들은 교과서 문제로부터 슬그머니 꼬리를 빼는 건 아닌가. 이 쟁점이 또 대지에 묻혀 내년 봄이면 더 많은 싹들로 자라나도록 방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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