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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없는···나는 여기에서 산다”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없는···나는 여기에서 산다”
  • 하혜린
  • 승인 2021.02.2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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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예술창작터 문인사 6번째 기획전
「여기에서 나는 산다」 온·오프라인 전시 개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한다. 나는 여기에서 산다.” 

전시장 입구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은 김훈 작가의 말이다. 작가의 저서 『흑산』을 발췌한 문장이 전시의 주제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산다.” 이 문장에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라는 도끼를 든 작가의 모습이 집약된 채 녹아있다. 

 

「여기에서 나는 산다」 전시전경. 사진=성북예술창작터

성북문화재단은 성북을 기반으로 활동한 문인 중,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인물을 매년 한 명씩 조명해왔다. 올해 6회 차를 맞이한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는 김훈이다. 전시 「여기에서 나는 산다」는 재난적 상황 속에서도 ‘여기’를 견뎌내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시대의 풍경을 담아내고자 기획됐다.

김훈 작가의 작품과 연혁을 전시함과 동시에 동시대 시각예술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전시돼 있다. 전시에 참여한 시각예술 작가들은 김원진, 박광수, 정현, 최요한 작가다. 이들은 현시대가 처한 상황을 목도하고, 실재와 허구가 중첩된 작품을 통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계를 은유한다. 

저마다의 목소리가 공명하다

김원진 작가는 기록된 기억이 변이되고 망각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는 폐기된 기록물들을 설치작품으로 구성해 보는 순간과 공간에 따라 달리 읽히는 기억과 기록, 역사에 대해 조명했다.  

박광수 작가는 드로잉을 통해 점과 선으로 대상과 공간을 만든다. 캔버스는 단일한 윤곽선이 아닌 무수한 점과 선으로 가득 차 있다. 창작의 과정을 ‘어두운 숲에서 헤매는 것’으로 비유한 그는 대상을 포획하려는 시도와 주변을 맴도는 마찰을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정현 작가의 설치 작품은 고성-속초 산불로 까맣게 타버린 나무이다. 이 나무는 사용되기도 전에 그 가치를 상실한 재료다. 자세히 보면 나무의 밑동은 타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틈 사이로 보이는 나뭇결은 생명력 넘치던 나무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최요한 작가는 사진을 통해 소외된 대상을 주변에서 떼어내 사건의 단면을 재구성해 조명한다. 과감한 구도와 강한 명도 대비는 불안정성을 극대화시키며,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감을 이끌어낸다. 

 

김원진, 「너를 위한 광장」, 2018, 책 태운 재, 밀랍, 석고, 5 x 5 x 245cm. 사진=성북예술창작터
정현, 「무제」, 2021, 목재, 300 x 300 x 100 cm. 사진=성북예술창작터

김훈 작가의 아카이브와 시각예술이 만나 상이한 맥락들을 만들어낸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자들은 표현할 수 없음에도 표현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다. 나아가 현실을 마주하는 다양한 시선들을 살펴봄으로써 사유의 가지치기를 시도해볼 수 있다. 전시는 오는 3월 27일까지이다. 

하혜린 기자 hhr210@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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