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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하는 페미니즘
연대하는 페미니즘
  • 교수신문
  • 승인 2021.02.2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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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백 지음 | 동녘 | 256쪽

역사학자, 시민운동가, 행정가로 종횡무진 활약해온 ‘올드 페미니스트’가 오늘을 살아가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 그리고 역사만큼이나 질기고 긴 연대에 관한 이야기. 성폭력특별법 제정과 호주제 폐지 등 굵직한 성과들부터, 유리천장 문제와 탈코르셋 운동처럼 여전히 진행 중인 이야기들, 그리고 여성들 내부의 빈부격차와 통일 문제 등 앞으로 더욱 관심이 필요한 이슈까지, 역사가의 눈으로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을 아우른다. 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연대의 힘’이다. 흔한 단어인 듯 보여도 연대는 변화를 원하는 약자들에게 여전히 가장 강력한 무기다. 이 소중한 힘을 온몸으로 경험해온 저자가 들려주는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는 앞으로의 페미니스트들이 이뤄갈 연대에 대해서도 전략과 지혜를 제공할 것이다.

 

1901년생 강주룡부터 1982년생 김지영까지

닮지 않은 듯 닮은 우리의 이야기

 

페미니즘 관점이 이제 시민의 필수 소양으로 자리 잡고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사람들도 늘어나면서 페미니스트들의 결도 다양해졌다. 이 책은 그중 한 예로 오늘날 젊은 페미니스트들을 지칭하는 ‘헬페미’를 든다. 저자는 이러한 구분이 생기는 것이 자연스럽고, 상당 부분은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절박한 문제의식을 사회가 미처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면서도, 차이가 너무 부각되는 나머지 여러 세대가 함께 공감하고 싸울 수 있는 지점마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저자가 보기에 1931년 고무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대동강 을밀대 지붕에 올라갔던 노동자 강주룡과, 그로부터 80년이 지나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조선소 크레인에 올라가 309일을 버틴 노동자 김진숙은 크게 다르지 않으며, 100년 전 선구적 페미니스트로 살다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나혜석과,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의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준 ‘김지영’의 이야기는 이어져 있다.

이 책은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시 읽어냄으로써 이러한 이어짐을 보여준다. 한국 최초의 여권 선언인 [여권통문]부터 1970~1980년대 ‘공순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열악한 노동을 강요받았던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 여성 문제가 늘 다른 ‘우선순위’에 밀렸다는 문제의식 아래 1987년 민주화항쟁을 전후해 “함께 그리고 따로”를 표방한 ‘새 여성운동’에 주목한다. 또한 1993년 성폭력특별법, 1997년 가정폭력방지법, 2004년 성매매방지법, 2005년 호주제 폐지 등 오늘날 여전히 여성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법들을 제정하기까지 계기가 된 참혹한 사건들과, 이에 대응하기 위해 연대하고 전략을 세웠던 페미니스트들의 수많은 노력들도 소개한다. 분명 다른 시대의 이야기이지만, 들여다볼수록 지금의 현실과도 조금씩 겹쳐지는 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왜 어떤 여성은 더 빈곤할까?

‘여성을 위한 통일’은 가능한가?

우리가 새롭게 던져야 할 페미니즘의 질문들

 

이 책은 계급 문제와 통일 문제 등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한 문제들도 다룬다. 저자는 이 문제들이 마냥 느긋하게 여겨도 될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하는데, 그 주된 근거를 서구 페미니즘 운동의 궤적에서 찾는다. 서구의 자유주의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의 참정권, 교육권, 재산권 확립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지만, 한편으로는 백인 중상층 여성의 관점이 중추를 이루는 상황에서 노동 계급의 여성이나 유색 인종 여성에게 절박했던 노동과 생계 문제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저자는 벨 훅스의 말을 빌려 당시 이들이 페미니즘 운동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을 위한 ‘쓸 만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이를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도 적용한다. 비정규직 저임금 여성 노동자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함께 전전긍긍하는 남편”보다 상층 계급의 여성과 더 연대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능할지 묻는다. 페미니즘 운동이 동력을 확대해가려면 늘 ‘억압의 복잡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 문제에서는 독일 통일 이후 동독 여성들의 ‘잃은 자’ 경험을 예로 든다. 독일 내에서 상대적으로 빈곤했던 동독 지역의 사람들, 그중에서도 여성들은 통일 이후 보육시설 감소와 실업률 급증, 정치적 대표성의 하락과 같은 급격한 변화 속에서 ‘내부 식민지’의 최하층을 차지하게 되었다. 저자는 통일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목소리를 낼 여력이 있던 서독의 페미니스트들이 소극적으로 대응한 점, 동서독 페미니스트들의 교류와 이해가 부족했던 점 등이 통일 과정에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가 되지 않으려면 저자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도 젠더 관점의 통일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한다.

 

함께 걷지 않았다면 그 무엇도 당연할 수 없었다!

앞으로의 페미니스트들에게 보내는 연대의 편지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17개의 이야기들 속에서 시종일관 강조되는 것은 연대의 힘이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자각하지 못했던 20세기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에도, 일상의 정치를 대중화하며 ‘미의 신화’에 균열을 내고 있는 오늘날 탈코르셋 운동에도, 여성 정치인의 수적 확대를 넘어 새판 짜기를 구상하는 제도 정치의 운동에도, 놀라운 변화의 현장에는 늘 연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연대표는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과 성과들을 교차시켜 연대의 힘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흘러왔는지 한눈에 보여준다. 내내 역사를 강조하는 저자의 목적은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도,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고 싶어서도 아니다. 페미니즘을 나무뿐 아니라 숲으로도 바라보자고, 그래서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대하는 페미니즘’으로 나아가자고 말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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