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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원의 인류학
한의원의 인류학
  • 교수신문
  • 승인 2021.02.2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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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지음 | 돌베개 | 224쪽

오해와 편견에 휩싸인 한의학의 재조명

인류학과 철학의 언어로 한의학을 ‘번역’하다

 

2020년 여름, 대한의사협회 산하 의료정책연구소가 올린 홍보물이 공공의대·지방·한의학을 비하하며 여성혐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폐암 말기로 당장 치료제가 필요한 생명이 위독한 A씨. 생리통 한약을 지어 먹으려는 B씨. 둘 중 건강보험 적용은 누구에게 되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선택지를 고르게 하는 문항도 있었다. 이에 여성혐오라는 여론이 들끓었고, 연구소 측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여성에 관한 특별한 의도”는 없으며, “한방 급여화”를 비판하고 “한방이 과학적·의학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려 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과학적·의학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한의학. 이것은 한의학계와 대립각을 세우는 대한의사협회의 특수한 입장은 아니다.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한의학은 과학인가’라는 해묵은 논쟁은 끊이지 않고, 한의학은 비과학적이며 정체되어 있다며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편, 한의학과 전통의학을 현대 의학의 대안으로 여기거나 신비화하는 흐름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양극단을 벗어나면, 한의학은 우리의 일상과 의료 경험을 구성하는 익숙한 풍경이다. 동네마다 병원 옆에 한의원이 있고, 한약을 먹고 침 치료를 받으러 한의원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병을 한의학의 도움을 받아 나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럼에도 한의학은 여전히 오해와 편견에 휩싸여 있으며, 『동의보감』 같은 고서의 이미지, 또는 ‘음양오행’, ‘기’ 같은 말에 둘러싸여 있어 접근이 쉽지 않다.

이와 같이 한의학에 대한 세간의 이해가 척박한 현실에서, 경희대 한의과대학 김태우 교수가 한의학을 새롭게 조명하는 『한의원의 인류학』을 펴냈다. 의료인류학을 공부한 저자는 한의학 내부의 논리와 동학을 인류학과 철학의 언어로 ‘번역’해 들려준다. 한의학이 서양의학과 어떤 차이가 있고 그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는지 15년 동안 한의원과 병원을 오가며 쌓아온 생생한 현장 연구를 바탕으로, 두 의료를 성립시키는 사유의 근본, 즉 존재론과 인식론의 문제를 파고든다. 인류학자의 눈에 비친 진료실 풍경, 의료인과 환자가 주고받는 생생한 대화가 의료를 둘러싼 철학적 논의에 활력을 부여한다. 이 책은, 한의학의 원리가 궁금했던 이들에게는 오래된 지적 갈증을 해소해줄 경험이, 한의학을 불신했던 이들에게는 그간의 선입견을 무너뜨릴 기회가 될 것이다.

 

하나가 아닌 몸, 세계와 연결된 몸

서양의학과 의료‘들’ 곁에서 한의학을 읽다

 

지난 1년간 코로나19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며, 우리가 의료와 분리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은 더 명확해졌다. 이와 함께, 최근 몇 년 전부터, 건강 실용서에서 벗어나 병과 죽음, 병원과 의료계를 조명하는 책들이 출판계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현직 의사가 쓴 에세이부터 정신의학자나 의료사회학자가 쓴 책까지, 의학·의료에 관련된 책들은 관점과 서술 방식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이는 우리의 몸과 건강, 그리고 의료 시스템을 둘러싼 다각도의 이야기를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한의원의 인류학』 또한 이처럼 의료의 영향력이 증대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한의학을 중심으로, 하나가 아닌 의료‘들’에 관한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의료인류학자의 시선으로 병원과 한의원 현장을 교차시키며, 상대적으로 출판 담론의 변방에 존재하는 한의학을 본격적인 ‘논의’(논쟁이 아니다)의 장으로 이끌어낸다. 저자는 몸에 대한 이해는 하나가 아니고 몸 바깥에 대한 이해와 연결되어 있으며, 의료는 이러한 “몸 밖의 세계도 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연결의 체계”이기 때문에 의료를 통해 몸 안팎의 연결성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모든 의료에는 저마다 존재(몸)와 인식(앎)과 언어(말)을 잇는 연결성의 체계가 있다.”(200쪽) 의료가 무엇을 병이라고 하며 그것을 어떻게 의학의 언어로 표현하는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몸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의료가 앎의 대상이자 표현의 대상인 몸에 어떻게 개입해 몸을 낫게 하는지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몸 안팎, 즉 존재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접근할 수 있다.

이 책은 한의학을 서양의학과 ‘병치’하면서 “세계에 대한 하나 이상의 이해가 존재한다는 것, 그 세계들을 사는 인간의 존재 방식 또한 하나로 획일되지 않는다는 것”(28쪽)을 드러내 보인다. 또한 어떤 의료도 몸의 모든 양상을 온전히 다 설명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가령, 서양의학은 몸의 물질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때문에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에 대한 설명이 약할 수밖에 없고, 한의학은 살아 있는 몸의 가변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몸의 물질적인 측면에 대한 설명이 덜 구체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들 의료의 이해를 모아보면, 몸이라는 다차원의 모자이크를 맞춰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30쪽) 나아가, 환경 문제를 비롯해 기존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이 책은 “몸과 존재들이 관계 맺는 방식‘들’을 통해, 노멀에서 관계를 실천해온 방식을 돌아보고 그 너머의 관계를 상상”(199쪽)할 수 있는 풍부한 자원을 제공할 수 있다.

 

객관 없는 앎, 몸-마음-자연의 세계

진단과 처방 너머, 한의학의 ‘기반’을 들여다보다

 

『한의원의 인류학』은 의료의 세부 주제인 진단, 의학 용어, 치료를 차례대로 살펴보며, 한의학을 중심으로 의료의 세계를 탐험한다. “한의학은 어떻게 몸과 아픔을 이해하는가? 어떻게 동아시아 사유 속에서 인간 존재 그리고 그 존재들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가?”(29쪽) 이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관심사이다. 저자는 한의원과 병원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어떤 말들이 오가고 어떤 진단과 처방이 이루어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며, 그 너머에서 의료 지식과 실천들을 떠받치고 있는 기반, 즉 각 의료에 내재한 인식론과 존재론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섬세하게 담아낸다.

1장이 의료인류학과 이 책의 관점을 개괄한다면, 2장은 본격적으로, 병원과 한의원에서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서는 풍경으로부터 시작해 ‘왜 진단에서 의사는 통상 모니터를 바라보고 한의사는 환자를 바라보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보고자 하는 대상에 차이가 있으며, 한의학을 포함한 동아시아의학(저자는 캄포의학, 중국의학, 고려의학, 한의학이 공유하는 내용을 말할 때는 ‘동아시아의학’을, 한국이라는 장소성과 연결된 의학·의료의 내용을 말할 때는 ‘한의학’을 사용한다)은 질병독립체를 강조하는 서양의학과 달리 흐름의 상황을 읽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대답을 들려준다. 이와 함께, 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기’(氣)가 등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일상의 사례를 들고 질문을 바꿔 우리가 ‘기’에 접근할 수 있는 탁월한 길을 안내한다(‘기’를 비롯해 한의학을 둘러싼 오해 많은 용어들에 가까워지고 싶다면 「덧붙여」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

3장은 ‘왜 병의 이름으로 서양의학은 고지혈증, 간암, 추간판탈출증 등을 쓰고, 한의학은 기울, 소갈, 중풍 등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기하학적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대상을 지시하는 서양의학과 달리, 한의학에서는 “맥상(脈象)의 상상력”이 작용하며, 주체와 객체 사이의 상황이 중요하다. 저자는 미술(후기인상주의와 사실주의)의 표현 방식을 에둘러,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언어, 나아가 병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른 이유를 규명하며, 한의학(동아시아의학)이 서양의학과 달리, 객관 없는 앎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그러므로 한의학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비난은 정당한 비판이 아니다.

4장과 5장은 한의학에 집중해, 각각 침과 약을 통한 치료를 다룬다. 동아시아의 ‘치’ 개념으로부터 출발해, 한의학의 방향성이 “본디의 순조로운 흐름, 본디 생명의 경향”을 도와주는 것임을 밝힌 다음, 어떤 원리로 치료가 이루어지는지 살펴본다. 몸 자체의 가능성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 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해하기 쉬운 개념인 ‘음양’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저자는 프랑스 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의 논의와 ‘아날로지(즘)’ 개념을 통해 동아시아 존재론과 그에 바탕을 둔 침 치료를 최대한 낯설지 않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특히 강조되는 지점은,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보는 서양의학과 달리, 한의학은 마음 또한 몸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저자는 스트레스로 안면근육 떨림을 호소하는 환자, 그리고 우울한 감정을 경험하는 환자의 사례를 이야기한다. 한편, 약은 몸 밖의 존재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저자는 같은 불면 증상을 겪지만 처방이 다른 두 환자의 사례를 들며, 이러한 한의학 처방의 특징은 진단부터 치료까지 아우르는, 일관된 몸에 대한 이해가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본초’(효과가 두드러지는, 약으로 쓸 수 있는 존재들의 무리)와 ‘약성’(약의 성미에 관한 지식)을 통해 한의학이 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인간 너머의 존재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짚어본다. 동아시아에서는 인간 존재도, 비인간 존재도, 물질들도, 포괄적인 자연 속에서 함께 유동하며 서로 연결되어 있고, 치료 또한 그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다.

이처럼 『한의원의 인류학』은 진단과 치료의 과정을 따라가며, 객관 없는 앎, 몸과 마음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는 한의학의 세계관, 과학 바깥의 지식이 들릴 수 있도록 한다. 한의학(동아시아의학)은 서양의학과 다른 기반, 즉 다른 존재론과 인식론 위에 존재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전달함으로써 한의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한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익숙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몸과 아픔, 나아가 지식 일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의 존재와 세계를 다르게 볼 수 있는 생각의 도구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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