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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 악사
맹인 악사
  • 교수신문
  • 승인 2021.02.1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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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코롤렌코 지음 | 오원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368쪽

 

그가 무엇을 보았고, 어떻게 보았으며,

정말로 본 것인지 등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러시아 인도주의 문학의 거성, 코롤렌코가 전하는

연민과 사랑, 정의와 연대에 관한 네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

 

러시아 문학에서 인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언론인, 사회비평가, 사회활동가로 활동하며 당대 작가들은 물론 후대에 이르기까지 존경과 사랑을 받아온 블라디미르 코롤렌코가 숨을 거둔 지 올해로 100년. 그의 대표작을 모은 『맹인 악사』가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64번으로 출간되었다.

 

1921년 폐결핵으로 68세의 나이에 숨을 거둘 때까지, 언론을 비롯하여 사회비평과 문학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코롤렌코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187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술연구소에 입학했으나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1874년 모스크바로 이주해 페트로프 농립업 아카데미에 입학한 작가는 일찍부터 변혁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1876년 인민주의 학생 운동에 가담, 체포되어 퇴학 처분과 함께 크론슈타트로 유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이후 1977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하여 광업연구소에 입학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으며, 1979년 7월에 최초의 문학 작품인 「탐구자의 삶의 에피소드들」을 잡지 『말』에 발표했다. 이런 코롤렌코에게 다시 한번 시련이 찾아왔다. 혁명가들과의 접촉을 밀고당해 당국에 체포, 투옥된 후 광업연구소에서 퇴출되었고, 뱌트카현의 글라조프를 거쳐 톰스크, 페름 등에서 또다시 유형을 살았다.

 

작가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881년 신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절하여 1884년까지 또다시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8여 년에 걸쳐 힘겹고 참혹한 수형과 유형 생활을 보낸 작가는 그러나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삶에 대한 불굴의 의지와 자유와 정의에 대한 강렬한 지향은 이 시간이 코롤렌코에게 준 선물이었다. 이것이 바로 향후 그의 문학 활동에 귀중한 자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코롤렌코의 진보성과 인본성을 탁월하고 심오하게 구현한 네 편의 대표작

 

1885년, 마침내 유형 생활을 마치고 니쥐니노브고로드로 돌아온 코롤렌코는 그다음 해에 결혼을 하고 1895년까지 10년 동안 창작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갔다. 이 시기에 씌어진 주요 작품들에서 작가는 어린 시절 우크라이나에서의 남다른 추억과 시베리아 유형에서의 쓰라린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과 사회(자연)의 관계라는 문제를 심오한 심리적·철학적 통찰을 통해 형상화했다. 또한 삶의 충만과 조화 그리고 행복은 오직 내적 이기심을 극복하고 타인들과의 연대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이번 책에 실린 「마카르의 꿈」 「나쁜 패거리」 「숲이 술렁거린다」 「맹인 악사」 네 편 역시 이 시기에 씌어진 코롤렌코의 대표작이다.

 

코롤렌코에게 사실상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마카르의 꿈」은 시베리아 유형 생활의 체험에 기초한 일종의 ‘성탄절 이야기’로서, 한 편의 동화 같은 작품이다. 헐벗고 무지하며 죄 많은 농부 마카르의 현실과 꿈의 대비를 통해, 부정한 사회구조를 냉철하게 비판하고 비참한 민중의 삶을 통렬하게 담아냈다. 간결한 유머를 통해 전하는 가난과 눈물, 노동과 고뇌로 상징되는 마카르의 삶을 평범하고 정직한 사람들를 향한 인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쁜 패거리」는 작가의 어린 시절의 체험에 근거한 자전적 작품으로, 사회로부터의 소외에 대항하는 아이들 사이의 연민과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작가 특유의 통찰을 보여준다. 특히 이른바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시베리아의 방랑자 틔부르치는 자유, 긍지, 자주, 서정의 담지자로서 고리키의 초기 작품에 등장하는 낭만적 부랑자의 선구적 형상으로도 간주되는데, 여기서 자유와 정의에 대한 작가의 끝없는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숲이 술렁거린다」는 ‘폴리시예의 전설’의 형식을 띠는 작품으로, 남러시아의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펼져진다. 오직 자유를 위해 현실의 불의에 과감히 도전하는 산지기 로만과 카자크 오파나스의 모습을 음울하고 낭만적인 서사에 담아내고 있다. 이들의 저항은 맹목적이고 거칠지만 그들의 주인을 죽음으로 몰고 갈 만큼 거대한데, 이러한 모습이 숲과 폭풍우의 이미지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마지막에 압제자 판에게 몰아닥친 정의에 이르면, 작품 내내 숲을 술렁거리게 만드는 폭풍우의 엄습처럼 갑작스럽고도 불가피하며 예리한 작가의 전언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맹인 악사」역시 「나쁜 패거리」처럼 자전적인 성격의 중편소설이다. 우크라이나의 자연, 역사, 문화에 대한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묘사뿐만 아니라 빛으로 상징되는 삶의 완성에 대한 주인공의 지난한 추구를 통해 인간 자체에 대한 담대한 신뢰를 피력하고 있다. 특히 삶의 완성을 향한 갈망이 이기적인 추구가 아니라 이타적 연대로 형상화되는 것에서, 불행한 사람들과의 공감과 나눔이라는 타인들에 대한 작가의 일관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작가가 일컬었듯이, 이 작품은 결코 간단치 않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의 내면세계와 외적 행위에 대한 내밀한 ‘심리학적 탐구’의 의미심장한 결실이다.

 

특히 이 작품은 1886년 처음 발표한 이후 여섯 번에 걸쳐 개작될 정도로 코롤렌코가 심혈을 기울인 대표작으로, 러시아와 해외에서 거의 유일하게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1960, 모스필름)되어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189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간된 여섯번째 판본은 가장 괄목할 만한 변화를 담고 있는데, 그간의 가벼운 수정에 만족하지 못한 작가가 종루에서의 에피소드를 추가했다. 코롤렌코는 1916년 비평가 고른펠드에게 보낸 서한에서 “주요한 예술적 과제는 특별한 맹인의 심리학이 아니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존재의 충만에 대한 범인간적 애수의 심리학”이라고 설파하기도 했다.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고 지향한 작가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억압과 부정이 넘쳐나는 당대 현실에 대한 저항과 극복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러한 코롤렌코를 향해 당대 작가들의 찬사 또한 이어졌다. 부닌은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문학과 삶을 너무나 풍요롭게 만드는 거인처럼 건강하게 살고 있는 아름답고 순결한 코롤렌코 덕분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했고, 고리키는 “나는 많은 문학가와 친해졌지만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내가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이지만 나의 스승이었고, 지금까지도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다”고 고백했으며, 체호프는 “맹세컨대 코롤렌코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다. 나란히 걷는 것뿐만 아니라 뒤따라가는 것조차도 기분이 좋다”라고 회상했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혼과 강직한 양심을 지녔던 작가 코롤렌코. 그의 작품은 당대를 넘어 여전히 커다란 울림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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