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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똑똑이들의 비관론 넘어선 한국 사회 자기객관화
헛똑똑이들의 비관론 넘어선 한국 사회 자기객관화
  • 박강수
  • 승인 2021.02.26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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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추월의 시대』
김시우, 백승호, 양승훈, 임경빈, 하헌기, 한윤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384쪽

 

1828년 5월 2일, 22살의 존 스튜어트 밀은 한 토론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비관론에 대한 비관론’을 표명했다. “세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것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주장을 편다. 똑똑하고 현실적인 그들은 어떤 사태를 설명하든 인류를 가장 아둔하고 부도덕적으로 그리는 방식을 택한다.” 그는 이어서 일갈한다. “모두가 절망할 때 희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희망할 때 절망하는 사람이 대중에 현자로 추앙된다. 남들보다 멀리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멀리 보지는 않는 것을 지혜라 생각하는 것 같다.”


‘멀리 보지 않음으로써 비관하고 비관하기 때문에 똑똑하게 여겨지는 현상.’ 청년 존이 탄식한 이 경향성을 『추월의 시대』(이하 ‘추월’)에서는 “단순한 비관론”이라고 부른다. 저자들은 한국사회의 자기 평가도 오랜 세월 이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 말한다. 습관에 가까운 사대주의와 ‘헬조선’, ‘국뽕’ 등 냉소적 조어에 우리의 열등감을 다그쳐온 유구한 한국식 ‘셀프 디스’가 깃들어 있다. 문제는 이런 비관론이 실제 현실을 파악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다. 책을 기획한 새로운소통연구소의 하헌기 소장은 서두에 “한국사회에 만연한 담론적 비관론은 ‘너무 급속히 성장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문화지체’”라고 표현한다.


한국의 우울은 ‘우등생의 우울’


『추월』은 이 지체를 따라잡는 자기객관화에 대한 이야기다. 정확히는 ‘낙관적 자기객관화’를 위해 담론을 재정비하는 작업이다. 한국 사회를 객관화하는 지표로 다음과 같은 숫자들이 있다. GDP 규모 세계 10위, 군사력 랭킹 세계 6위, 혁신 지수 세계 1위, 코로나19 초기 대응도 평가 OECD 1위 등. 여기에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 노인 빈곤율, 산재 사망률과 가장 낮은 출산율 등이 얹힌다. 이 명암대비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이런 식이다. 한국은 껍데기를 키우느라 알맹이를 놓쳤고 선진국이 되는 데 실패했다. 『추월』은 이를 뒤집어 읽는다. 한국은 선진국이 되는 데 지나치게 성공했고 그 결과 선진국의 문제들을 떠안게 됐다.


“한국의 우울은 열등생의 우울이 아닌 우등생의 우울”(217쪽)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우등생’이고 ‘민주주의 우등생’이다. 이때 우울증은 실패의 유산이 아니라 성공의 유산이 된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실패의 유산’이라는 관점에서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은 ‘어느 세력의 실패 탓인가’를 따지는 소모적 정쟁으로 귀결되기 쉽다. 서로의 성취를 인정 않는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대결이 오늘날 이 함정에 빠져 있다. 반면 ‘성공의 유산’이라는 인식을 공유할 수 있다면 각각의 역사적∙사회적 성과는 인정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문제들에 대한 협력과 대응의 논리를 세울 수 있다.

 

사진=연합
사진=연합

 

즉, “역사화해서 집에 잘 보내드리기”(165쪽) 전략이다. 한국의 양대 기득권 세력에 ‘당신들 잘못이니 시인하고 사퇴하세요’가 아니라 ‘미션 클리어입니다. 앞으로는 후세대에게 맡기고 귀가하십시오’라는 서사를 만들어주는 일이다. 저자들은 “히어로의 위선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히어로를 퇴장시킬 수 없다”라고 말한다. 임무가 완수됐다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폐쇄 서사에 갇힌 극단적 이념 대결을 훌쩍 뛰어넘어 실질적 대안의 영역에 진입한다. 이에 대해 양승훈 교수는 지난 교수신문 인터뷰에서 “사회적 논의의 축을 옮기고 새로운 대표성의 정치를 고민하는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사대주의와 이념 양극화의 습속을 끊다


축을 옮기면 논의의 지형도 바뀐다. 이를테면, 한국의 정치는 무능한 엘리트주의의 실패를 다수 시민의 효과적인 포퓰리즘으로 이끌어온 과정이었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이때 한국의 높은 대학진학률과 경쟁적 교육열은 유능하고 기민한 시민을 길러내는 조건이 된다. 미국과 일본, 유럽의 제도와 문화를 찬미해 온 맹목적 시선은 한국을 방역 선두에 세운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힘을 잃는다. 앞으로 한국은 더 많은 선진국의 문제를 반면교사 없이 맨 앞줄에서 맞이할 것이다. 선진국의 고질병 중 하나인 저성장과 양극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공채공화국을 타파해 사회적 역동성을 복원해야 한다. 그간 한국사회를 질타해온 ‘단순한 비관론’을 전복하는 생각들이다.


부정확한 비관론은 주장하는 사람 한 명을 현인처럼 보이게 하지만 ‘현명한 낙관론’은 사회 전체에 생산적 공론장을 열어준다. 『추월』은 스스로 이루어 낸 것을 자각해야 놓친 것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대범하면서도 정교하게 고안된 정치적 제언에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국회 교섭단체 연설로,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추천사로 응답했다. 이어서 이관후 연구위원은 “이 책을 읽을 사람들이 만들어갈 세상이 기대된다”라고 적었다. 지적이면서도 낙관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 목소리는 귀하다. 이 책이 가능한 크고 깊은 파문을 그리길 바란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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