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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금·연구비 허위 작성 지시를 받는다면?
장학금·연구비 허위 작성 지시를 받는다면?
  • 김봉억 기자
  • 승인 2004.07.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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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대학에서 '윤리적 의사결정'은 가능한가

A대학 김아무개 교무처장. 김 처장은 어느날 학교재단으로부터 장학금과 연구비 등을 허위로 작성할 것을 지시받았다. 내가 김 처장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단호하게 거부를 할 것인가, '윤리적 딜레마'에 빠져 들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것인가, 아니면 제 3의 결정을 내릴 것인가.

최근 허위문서 작성 등의 수법으로 4백억 원이 넘는 등록금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난 동해대 사건은 사학재단의 의사결정구조에서 법인 이사장과 총장의 어떤 지시에 구성원들이 얼마나 합리적으로 '윤리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한가도 가늠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지난 달 23일부터 사흘간 강원도 양양 오색그린야드호텔에서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개최하는 대학교수·직원 연수 가운데 하나인 '전략 경영관리 과정'. 둘쨋날 '윤리적 의사결정론'(강사 최창명, 경희대 국제경영대학 강사)이라는 주제의 강의가 열렸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대학교수,직원 연수 프로그램인 '전략 경영관리 과정'중 '윤리적 의사결정론' 강의 장면. © 김봉억 기자

이번 연수에는 팀장급 이상의 교직원과 처장급 보직자, 교수 등 15명이 참가했다. 이 강의는 조직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사례를 두고 '윤리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자기검토' 과정에 대한 강의와 3∼4명씩 조를 짜서 사례별 조토론이 함께 이뤄졌다.

3조가 맡은 사례는 '내가 교무처장의 입장에서 상부로부터 장학금과 연구비 등을 허위로 작성할 것을 지시받은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다. 최근 사학비리를 일으킨 동해대 사례를 놓고 '윤리적 의사결정 기법'을 연습해 보는 이 강의에서 일부 사학재단의 일로 여겼지만 '이론과 현실'의 간격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윤리적 의사결정을 위한 기법은 윤리적 문제의식으로부터 최적안의 선택까지 6단계로 이루어 진다. 1단계 사실파악 및 윤리적 문제인식, 2단계 관련된 이해관계자 파악, 3단계 이해관계자별 영향 파악, 4단계 가능한 해결안 및 이해관계자별 영향분석, 5단계 해결안별 결과 예측 및 문제 파악, 6단계 최선안의 선택이 그것이다.

한 명의 교수와 3명의 직원이 머리를 맞댔다. 지급도 하지 않은 장학금과 연구비를 지급한 것처럼 허위로 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명백히 비윤리적인 행동이지만 그러나 교직원으로 처세를 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문제의식과 윤리적 딜레마에 빠져 든다.

2∼3단계에 들어서면 허위문서 작성 사실이 알려져 교무처장인 자신과 가족, 동료교수를 비롯해 학생과 학부모, 해당 대학과 법인 이사장은 양심의 가책은 물론 법적 제재를 받게 된다. 또 사회적 비난과 대학의 명성에 손상을 입게 되는 것도 물론이다.

4∼5단계에 다다르면 세가지 해결방안을 놓고 윤리적 판단을 하게 된다. 상부의 지시를 이행하면 이사장에게 신임을 얻을 수 있지만 교무처장 자신은 공범이 되고,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이해관계자는 모두 피해를 보게 된다.

한편으로 부당한 지시에 대해 불이행을 선택했다면 교무처장 자신은 '직위해임'도 각오해야 하지만 다른 이해관계자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는다. 한 조직안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밀려 나는 것도 고민꺼리다. 마지막은 이사장 설득. 설득만 된다면 교무처장 자신도 이해관계자들도 피해는 없다.

이 세가지 해결방안 가운데 3조는 '나의 행동은 합법적인가, 나는 공정하고 정직한가, 오늘 밤 나는 편히 잘 수 있을까, 앞으로 후회하지는 않겠는가' 등의 '윤리적 자문답'을 통해 '이사장 설득'을 선택했다. 부당하게 느끼는 지시에 대해 이행하는 것은 명백히 비윤리적인 행위이고 지시를 불이행해도 현실적인 여건에서 '윤리적 딜레마'에 빠져들지만 한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이사장을 설득하는 것이 도리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러나 토론 과정에서 단계별 기법에 따른 연습에서는 이같은 결정이 났지만 현실에서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지시에 따를 수 밖에 없다"라는 현실론이 앞섰다.

오히려 이런 지시가 떨어지면 대부분 문제없이 처리할 것이라는 입장이 우세했다. 발표가 끝난 뒤에도 한켠에서 이 3조의 발표를 듣고 있던 한 교수는 "발표 내용의 현실성도 평가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지적이 있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대부분은 "대충 넘어간다"는 것이다. 실제 동해대 사건 당시 허위문서 작성에 참여했던 이 대학 관계자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장학금은 일절 하나도 없는데 (총장이) '이번에 장학금 2억원 만들어' 하면 만들어 버리죠. 비자금 통장 자체가 학교통장이고 대충 대충 직원들 끼리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직은 현실론이 앞서는 것이 대학의 현주소다.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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