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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_비평이여, 자폐성을 걷어라
문화비평_비평이여, 자폐성을 걷어라
  • 김영민 한일장신대
  • 승인 2004.07.02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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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이 일종의 再-역사화라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은 그 역사화의 자가당착을 슬며시, 소상히, 내비치는 것이다. 가령, 역사화를 力說할수록 오히려 逆說에 빠지게 되는 사정을 은근히 드러내려는 몇몇 좌파 비평가들의 작업은 그 자가당착의 고름이 스스로 곪아터지게 한다는 점에서 의외로 재치있다.

싸우면서 닮는다듯이, 최소한 스타일과 디자인에는 좌우의 완고한 구별이 없어 보인다. 아무튼, 역사화의 과장과 力說이 사실들의 지형을 지리멸렬한 기호론과 차이론으로 번역해내고, 이로써 역사 해석의 현란한 이미지만을 남긴 채 그 근실한 이력은 생략되는 逆說은 역사화로 치달은 현대학문에 만연한 속병이다. 중세적 자연화를 인간화-역사화함으로써 가능해진 근대성은 다시 과학주의적 자연화의 위기를 초래하였고, 재자연화에 대한 메타비판으로 각광을 받은 포스트모더니즘의 再역사화는 오히려 그 力說에 의해 逆說的으로 재-재-자연화의 위기에 빠진 셈이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고르게 분배하는 공부의 기본은, 모든 기본이 그렇듯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 力說-逆說의 구조는 1990년대 이후 만연한 이른바 '문화비평'류의 글쓰기에서도 고스란히 읽힌다. 문화의 사북은 역사의 무늬이지만, 문화비평들이 共時의 만화경과 스펙타클의 자폐적 관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일관하는 모습은 오히려 비역사적이다. 우리 사회의 문화비평 역시 그 계보를 잃어버린 채 수입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화(소프트웨어)와 대중독서 시장(하드웨어)을 연결하는 상업적 매개 장치들이 봇물터지듯 개발되고 번성함으로써 가능해진 전염주술적 풍경에 다름 아닌 듯하다.

이론과 다른 '비평'의 본의는 무엇보다 경계적 위기의식에 따른 실천적 개입인데, 비평이 文化的 力說에 얹혀 현상의 비정치적 묘사, 그리고 기호론적 배치와 해석에만 골몰해있다는 것은 문화비평적 글쓰기의 파행이며, 크게는 文禍的 逆說의 징후일 것이다.

정치적 패배주의의 일종인 관념론적 자유주의가 전래의 욕망들을 한결같이 기호화하고,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프로이트)에 몰각된 채 그 기호 속의 가냘픈 자유를 자유의 최대치인양 호도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정치적 무기력/무능력에 빠진 양심은 우선 양비론으로, 심하게는 기호론적 分岐와 그 多聲의 만화경적 잔치로, 마침내는 뜬구름잡는 道學으로 숨어 들어간다. 이처럼, '과욕'과 '금욕'이라는 동전의 양면 같은 정치적 패배주의의 두 상반된 양식은 결국 똑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이들에게 하급의 윤리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비평적 글쓰기를 정치적 패배주의를 가리거나 왜곡하는 고급의 알리바이로 오용치 말라는 충고를 하고 싶을 뿐.

문화비평을 역사화의 자가당착, 묘사의 관념론, 정치적 패배주의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작업은 역시 비평의 본의로 귀환하는 일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역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님을 주장하는 그 순간에도 역사에 대립하고 있다"는 엘리아데(M. Eliade)의 지론은, 비록 그 논의의 맥락은 다르되, 역사화의 실핏줄적 현실을 묘사하는 문화비평의 거울상에 실천과 생활정치의 窓을 열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문화적 자폐성, 그 거울집을 벗어날 수 있는 문화비평. 미래! 의 문화비평가들이 할 몫이다.

김영민 / 한일장신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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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2004-07-09 13:31:04
이 글의 원제목은 <문화비평과 정치적 패배주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