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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 : 『심원한 단순성(Deep Simplicity)』(존 그리빈 지음, 2004)
본격서평 : 『심원한 단순성(Deep Simplicity)』(존 그리빈 지음, 2004)
  • 이택광 영국통신원
  • 승인 2004.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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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세계를 설명하는 심원한 단순성의 원리

이택광 영국통신원 / 셰필드대 박사과정

영국은 가히 대중적 과학서의 천국이라고 할 만한 곳이다. 분기별로 출간되는 과학서의 양도 그렇지만, 그 소재와 범위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참으로 뉴턴과 다윈의 자손들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과학서들을 읽어내는 독자층도 다종다양하기는 마찬가지. 청소년들로부터, 대학생과 주부들, 그리고 노인들까지, 어려운 주제도 아랑곳없이 서점의 진열대를 장식하고 있는 책을 손수 사서 읽어줄 독자층은 참으로 두텁다. 하기야 책을 써줄 사람이 있어야 독자층도 더 깊고 넓게 형성될 것 아닌가. 이런 분야의 책을 쓰기 위한 전문가 집단이라고 하면, 으레 우리는 대학교수들을 떠올리지만, 일찌감치 대학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안착돼 버린 영국의 경우, 오히려 대학강의는 부수입이고 이런 과학서적을 집필해서 먹고사는 전문 저술가들이 더 많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올해 1월에 출간돼서 호평을 받고 있는 존 그리빈의 '심원한 단순성: 혼돈, 복잡성, 그리고 생명의 출현'이라는 책도 이런 영국다운 현실의 산물이라고 할 만하다. 이미 그리빈은 '과학: 하나의 역사'라는 책을 출간해서 주목을 받은 작가다. 원래 천체물리학을 공부했던 그는 지금 현재 서섹스대의 천문학과에 객원 연구원으로 적을 두고 있으면서, 주로 물리학에 대한 대중적 과학서를 써왔다.

어떻게 보면 이번 책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그 동안 저자가 걸어온 궤적에서 다소 이탈한 것이기도 하다. 주로 근대 물리학에 대한 주제를 다뤘던 저자는 정작 이 책의 주요 주제이기도 한 '혼돈의 이론'이 한창 인기를 얻을 1980년대 당시에는 관망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혼돈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을 숙성시켜서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음을 서문에서 고백하고 있다.

"10년 뒤에도 혼돈이론이 소멸하지 않거나, 누군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 이론에 대해 설명하는 책을 쓰지 않는다면, 내가 이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라고 생각했다는 저자의 진술은 사뭇 장난기마저 어려있다. 이 말은 결국 저자 자신이 이 책을 쓰기 위해 참고했던 숱한 참고문헌에 대해 그렇게 만족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트를 윤활유로 비판을 사생결단의 인신공격이 아니라 그 도마 위에 오른 사람마저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설득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영국 비평의 오랜 전통이다. 주제에 대한 뻑뻑한 조밀성으로 인해 자칫 따분하게 느껴질 진술들을 술술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이런 저자 특유의 위트가 책의 곳곳에 묻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 그리빈은 단순성과 복잡성의 관계를 과학적 입장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이 관계에 대한 고찰을 통해, 저자는 복잡성의 표면 뒤에 숨어 있는 단순성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생명의 기원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이 책의 골간을 이루면서, 각 장별로 흩어져 있는 작은 주제들을 최종 목적지인 생명공학의 문제로 밀고 간다. 저자의 주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다. 양극단은 극단적으로 단순하다는 것. 말하자면, 원자적 차원에서 개별적 분자의 운동은 단순한 물리적 법칙에 따라 이뤄진다. 또한 그 반대로, 우주의 차원으로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거대행성이나 항성의 내부는 중력이 모든 존재의 구조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단순하다. 한마디로 극과 극은 통한다는 상식에 대한 과학적 재확인.

하지만 그리빈은 이런 식상하기 그지없는 상식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겠다고 이런 예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빈은 이런 사실을 통해, 생명이란 것이 양극의 단순성 중간에 위치한 그 무엇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말하자면, 세계는 개별 분자들의 단순한 법칙들이 서로 관계를 맺어서 복잡해진 혼돈의 운동으로 소용돌이친다. 이런 그리빈의 주장은 이안 감독의 영화 '헐크'를 연상시킨다. 사막에서 헐크가 유심히 들여다보았던 바윗돌의 결은, 나중에 그가 하늘로 점프해서 위에서 조감해보는 사막의 풍경과 흡사하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헐크라는 괴물은 이런 두 가지 단순성의 극단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의 변이 자체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좀더 나아가서 본다면, 이런 그리빈의 주장은 J.R.R. 톨킨의 중간계와 상상력을 공유하고 있는 듯도 하다. 신과 인간 세계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중간계. 이 중간계는 복잡계의 문학적 전화가 아닐까. 과학과 인문학이 서로 행복하게 조우할 수 있는 처소도 바로 이런 복잡계라고 한다면, 지나친 낙관일까.

여하튼, 그리빈은 뉴턴의 물리학에서 복잡성 이론을 진자처럼 오가며 근대물리학과 혼돈의 이론을 서로 이어놓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는 근대물리학과 혼돈의 이론은 서로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고 보는 것 같다. 오히려 그는 근대물리학의 진보가 복잡성을 무시해버림으로 인해 발생한 일종의 도약으로 묘사한다. 말하자면, 근대물리학의 탄생은 사실관계와 무관한 '신념'의 도약이었던 것. 그러나 저자는 이런 신념의 도약이야말로 세계관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하나의 계기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이쯤 되면, 과학서는 더 이상 철학서와 다른 것이 아니다. 단지 다른 언어로 동일한 원리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이런 유사성이 발생하는 것일까. 물론 분과학문으로 개별화돼 있는 과학과 철학은 엄연히 다르겠지만, 그리빈의 말대로, "현상적 복잡성을 역동적 단순성"으로 설명하려는 자세에서 두 학문의 영역은 서로 공유하는 점들을 상호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그리빈은 이런 문제를 책에서 다루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확보한 전문성 내에서 그리빈은 복잡성을 설명하는 보편적 원리를 밝혀보고자 했을 뿐이다. 그리빈의 책은 다소 저널리즘적이었던 제임스 글렉의 '카오스'에 비해 훨씬 꼼꼼하다. 그는 단순하게 혼돈의 이론을 설명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최근의 과학적 성과까지도 포함해서 종합해내려는 열성을 부렸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간단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복잡성은 언제나 역동적인 내적 단순성을 기원에 가지고 있다. 그의 노력이 과연 과학적 상상력의 확대 이외에 이론적으로 명확한 결실을 맺은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네이처'에 서평을 기고한 마크 부케넌은 혼돈과 복잡성이 어떻게 생명의 기원과 관련돼있는지 이 책이 그렇게 성공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영국 워릭대의 '철학문학연구소'에서 철학 석사를 받았고, 현재 영국 셰필드대 박사 과정에서 영화와 문화이론을 전공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프레드릭 제임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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