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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 내 인생의 마감시간
학이사 : 내 인생의 마감시간
  • 조성남 이화여대
  • 승인 2004.06.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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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남 / 이화여대·사회학

언제나 학기 말 이맘때쯤이면 교수로서의 내 일상의 대부분은 마감시간에 쫓긴 초조함으로 채워지곤 한다. 게다가 미처 지키지 못한 마감시간을 조금만 더 연장해 달라고 궁색하게 애걸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체면을 구기고 자존심 상해 미안함과 자책이 얼얼하게 남게 되거나 때론 멋진 방학계획에까지 얼룩이 지고 마는 경우도 있다.

마감 시간에 쫓긴 공사는 부실 공사가 되고, 마감 시간에 쫓긴 글은 대작이 될 수 없으니 여유롭게 글도 쓰고 작품을 해야 무엇 하나라도 작품다운 작품이 될 텐데 하는 시작 전 내 바람과는 아랑곳없이 마감시간은 잔인할 정도로 엄밀히 그리고 빨리도 다가온다.

자존심이 망가지거나 얼룩이 지더라도 연장이 가능하면 좋으련만 한 치의 융통성이 없는 시간은 우리를 위해 멈춰 주지 않고 쉼 없이 흐른다.

교수로서의 나의 삶도 또 내 인생도 마감시간이 올 것이다. 우리의 시간이 매우 짧고 제한돼 있으니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짧은 시간이 남게 돼 갈수록 조급해 질 텐데 이러다 내 인생마감시간도 쫓기면서 맞게 되면 어쩌나. 행여 은퇴를 할 즈음까지도 마감시간에 쫓기는 초조함으로 은퇴 후의 멋진 계획에 얼룩이 지고 말게 되진 않을지 슬그머니 두려움이 스며든다.

이제 나도 至天命의 나이에 들어섰으니 내가 교수로서 맞을 마지막 학기말에는 적어도 마감시간에 쫓기지 않도록 미리 미리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준비되지 않은 강의는 빈곤해 허덕이고 겨우 시간을 채우고 나와 기분엉망이 되듯이 준비되지 않고 쫓기면서 은퇴하게 되는 날 뒤돌아 볼 교수로서의 시간도 또 그 이후의 내 인생의 시기도 엉망이 되지 않도록 '예비은퇴교수'로 지금부터 마음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훌륭한 화가는 언제 붓을 거두어야 하는 줄 알고, 훌륭한 지휘자는 어떻게 연주를 마감해야 하는 줄 안다"고 했다. 나의 삶도 어떻게 정리하고 마감해야 할지, 이를 위해 교수로서의 삶의 길에서 남기지 말 것과 남길 것이 무엇일지 생각이 문득 여기에 미친다.

정말 요즘은 은퇴교수들의 삶을 바라보면 예사롭지 않다. 예비은퇴교수로서 나 자신의 미래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은퇴교수들 가운데는 여전히 '늙지 않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아직도 '생산적'으로 '성공적'인 교수의 이미지를 지키려는 분들도 많다. 반면에 어떤 분은 학교는 물론 동료나 제자들과도 연락두절하고 숨어 지내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이주연의 '산마루서신'에서의 다음과 같은 글이 문득 떠오른다.

"나이가 들어서도 중단 없는 전진과 끝없는 도전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선, 자신의 삶에서 참된 것과 헛된 것을 결론지어야 합니다… 석양에 해가 기울 때에는 길이 어디인가를 확실히 기억하고 그 길로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가 기우는데 숲으로 들어가면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젊어서는 큰 꿈을 꾸고 나이가 들수록 꿈에서 빠져나와 작은 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얼마나 더 갈 수 있는가를 점칠 수 있고, 남은 시간이 많지 아니하기에 주어진 것들로 행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지 모르니 할 일 생각 날 때 지금 해야겠다. 오늘, 지금! 내일의 마감시간에 쫓기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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