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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상품으로 채워진 연극시장의 상투성
기획상품으로 채워진 연극시장의 상투성
  • 안치운 호서대
  • 승인 2004.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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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열전' 비평

2000년 이후 한국연극은 오리무중이고, 속수무책이다. 연극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었던가. 연극으로 내 삶의 어떤 결핍을 채울 수 있었던가. 공연도, 연극하는 동네도 모두 추해졌다. 치졸한 경쟁이 끊이지 않고, 연극에 대한 글쓰기와 말하기에도 거짓말과 얄팍한 글들이 많다. 많은 연극이 예술이란 이름으로 치장을 했지만 내용은 별 볼일이 없는 저질의 것들이었다. 배우들의 몸과 말에 향기가 없었다.

거친 언어와 행동들이 무대 위에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상투적이고, 비루한 몸짓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연극에 대한 담론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고, 연극을 공부하는 많은 이들이 연극에 기생충처럼 붙어 살아가고 있다. 싸움은 왜 그리 많은가. 공연하고 나면 적자나서 망했다고 말하면서 또 술이고 공연이다. 돈은 어디서 나는지. 연극동네에도 귀족은 있다. 그들은 예술과 경영의 줄다리기를 교묘하게 잘 해서 품위 있게 산다. 국민의 세금으로 낸 공공 지원금을 받아 공연하는 일이 많은데 게중에 좋은 작품은 드물다. 정말 연극은 아름다운 예술인가. 정말 연극은 사람 냄새가 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인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대학원 시절 처음 만난, 지금은 은퇴하신, 평론을 하셨던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어리석었지.” 나도 어리석었다.

‘연극열전’ 기획사는 이렇게 말한다. “2004년 한국연극 최고의 프로젝트”. “20년간 소멸되지 않는 생명력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장난 아닌 연극모음전”. 기간은 2004년 1월부터 12월까지. 장소는 동숭아트센터. 참가작품은 “에쿠우스, 남자충동, 햄릿, 허삼관 매혈기, 택스 드리벌, 백마강 달밤에, 오구, 피의 결혼, 한씨 연대기, 관객모독, 판타스틱스, 나잇 마더, 불쫌 꺼주세요, 청춘예찬, 이발사 박봉구”. 우선 관객들은 속지 말아야 한다. 프로젝트라고 말하는 ‘연극열전’은 기획사의 기획 상품이다. 모듬전과 같은 ‘모음전’이다. 공연작품들도 기획사가 정한 것일 뿐, “보석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표현이다. 그래서 ‘연극열전’은 기획사의 광고문구대로 “演劇列傳도 되고, 演劇熱戰도 되고, 연극열쩐”도 된다. 다 말 장난일 뿐이다.

이렇듯 한국 연극계의 커다란 변화를 한마디로 한다면 연극동네에서 연극시장으로의 옮김이다. 자본의 논리와는 거리를 둔 연극동네에서 천박한 연극시장으로의 변화는 연극에 대한 고민의 새로운 상수다. 시장이랄 수 없는 제도적 협소함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연극동네는 자본의 논리가 활개치는 시장이 됐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연극동네가 제 모습을 잃고 있음을 연극과 연극인들은 발견한다. 요즘의 용어를 빌리면 연극동네는 졸부들이 지닌 천민자본의 투기장소와 같다. 연극사업을 기획력으로 결정지을 수 있다고 믿고 실천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들에 의지해서 공연을 성사시키는 일은 가난했던 옛일을 갑자기 잃어버린 기억으로 삼고 대신 뭔가를 채우는 저급한 보상행위들에 다름 아니다.

‘연극열전’을 더러 보면서, 나는 1980년대 공연된 작품들이 그 후 견뎌내야 했던 20년이라는 시간의 켜를 주목했다. 연극은 시간과 어떻게 싸우는가. 연극은 기획사의 광고대로, “소멸되지 않는 생명력”을 지닌 예술인가. 한마디로 ‘연극열전’의 공연들은 1980년대 처음 공연됐던 것과 크게 변모하지 않았다. ‘남자충동’과 같은 작품은 처음 공연했던 그 때와 하등 다르지 않았다. 다만 처음 출연했던 배우들이 늙어간 것 이외에는. 연극은 공연되고 나서 소멸돼야 하고, 다시 공연될 때 시간의 무게를 지닌 채 다시 태어나야 하는 숙명을 지닌 예술이다. 그러나 오래전 흥행이 잘 됐던 상품으로서 그대로 유지되기 위해서 ‘연극열전’의 작품들은 “새로운 모습”이 아니라 그 때 그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최고의 연극들이 새롭게 태어납니다”라는 언급도 참 위험한 진술이다. 최고의 연극이란 결코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다른 작품들도 이와 같은 비평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 참에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오늘날 공연의 대부분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문예지원금의 지원금과 기획사의 투자로 이뤄진다. 그 지원금액과 투자금액은 적은 것은 아니다. 지원의 경우, 작가와 극단은 기획사에게 지원금 신청을 위임하는 경우도 있고, 스스로 지원신청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작품생산의 기원이 작가의 창조적 본능에서 지원금 수령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작품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대절명의 의식 대신 지원금을 받으면 하고, 받지 못하면 하지 않는 무책임한 꼴들이 연출되고 있다. ‘연극열전’의 작품들 가운데 몇몇은 기획사에 의해서 수천만원 씩 정부의 문예지원금을 받았다. 이처럼 연극의 주최가 극단이 아니라 기획사로 바뀌었다. 연극의 본질을 무례하게 바꾸어 놓는 이 문제는 심각한 연극의 위기를 말해주는 단면이다. 이렇게 연극으로 돈을 벌자고 하면 무슨 짓인들 못할까.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한국 연극계는 주변의 무용과는 달리 그리 크지 않았다. 연극동네라고 할 만큼 연극인들의 숫자 역시 많지 않았다. 많지 않았다는 것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하나는 전문화되지 않았고 모두들 연극동지처럼 서로간을 구분할 필요성을 지니고 못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돈벌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뭔가 의무감을 지니고 했다는 점이다. 동네는 인연으로 만나는 곳이라면 시장은 이익으로 만나는 곳이다. 이제 한국연극은 연극동네와 연극시장을 구분해서 연극의 위상을 달리 보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연극동네에서의 고민과 연극시장에서의 그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안치운 / 호서대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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