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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언어와 헤게모니
학이사: 언어와 헤게모니
  • 이강옥 영남대
  • 승인 2004.06.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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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와 국문학에서는 우리나라가 종주국이다. 외국 유학생들이 들어오니 우리가 나갈 필요는 없지.” 한국문학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이런 농담을 들었다. 온 나라가 영어 회오리에 휩쓸리자 그 농담은 영어에 서툰 한국학자들의 변명으로 들렸다. 세계화의 폭풍은 태권도와 한국문학도 그대로 두지 않았다. 태권도는 세계 각국으로 보급돼 올림픽 종목으로도 채택됐다. 우리가 금메달을 독점하는 듯 하더니 곧 쫓기는 처지가 됐다. 한국문학 연구자 중에서도 전국체전 출전은 그만두고 올림픽에만 나가겠다고 공언한 분이 있었다. 그분은 혼자 세계 각국을 오가는 활약을 하셨는데 어느새 한국학을 연구하는 외국인 학자가 늘어났으니 그분의 독주도 끝나가는 것 같다.

한국문학 연구에서는 손발이 안 통하기에 태권도와는 다른 애환이 따른다. 얼마 전 이탈리아 벨라지오에서 한국 문화의 이중 언어 현상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한국학이란 내용을 국제학술대회라는 형식에 담으려니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가 아주 중요한 사안이 됐다. 내용을 우선한다면 한국어를, 형식을 고려한다면 영어를 써야 했다. 미국과 독일, 프랑스 등에서 온 외국인 교수들은 그럭저럭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간 학자들은 종주국인 한국에서만 공부해 영어가 서툴렀다.

회의를 주재한 분이 ‘국제학술대회’임을 강조하며 영어로만 말하기를 고집해 첫째 날은 영어만 사용했다. 독일이나 네덜란드에서 온 학자들도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하며 토론에 참여했지만, 한국에서 간 우리들은 말문을 열지 못했다. 마주 앉은 그들이 때때로 터뜨리는 폭소가 우리를 향한 조롱으로 들리기도 했다.

외국에서 한국학을 하는 분들의 연구는 영역을 넓게 잡은 미덕을 갖췄지만 초점이 분명하지 않았고, 실증적 오류와 논리의 허점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좀더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는 한국의 학자들로부터 유익한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할 터인데 그것은 그들이 주도권을 잃는 것을 의미했다. 한국에서 간 우리들도 한국어로 토론에 동참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걸 계속 간청한다는 것은 자존심에 손상을 입는 일이었다.

결국 그들은 영어로, 우리는 한국어로 토론하게 됐다. 그리고 참 힘든 시간이 시작됐다. 한국어로 말할 수는 있게 되었지만 그들의 영어를 듣기 위해서는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다. 정확하지 않은 듣기는 엉뚱한 오해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우리의 한국어가 그들에게 잘 수용됐나 확인할 수도 없었다.

한국이 종주국인 학문에 종사하는 연구자들도 영어의 듣기와 말하기에 능숙해야 할 시대가 온 것 같았다. 양질의 생각도 서툰 영어에 담기면 유치한 생각으로 전락한다. 능숙한 영어구사자들이 한국학 연구는 물론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 영역까지 낚아채어갈 형국이다. 서툰 생각이 그럴듯한 영어에 포장되어 역수입되는 상황을 걱정한다.

학회를 마치고 산책을 하다가 발표장을 압도하던 미국인 학자를 만났다. 그와 나는 아득히 펼쳐진 알프스 절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큰 눈을 껌벅이며 다소곳이 듣고만 있었다. 담소가 한국어로 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적 공간에서든 사적 공간에서든 언어란 역시 헤게모니의 문제였다.

이강옥 / 영남대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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