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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의 역사 서술, 매너리즘을 벗다
춤의 역사 서술, 매너리즘을 벗다
  • 문수현
  • 승인 2021.02.10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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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말하다_『이 춤의 운명은 (살아남은 작품들의 생애사)』 정옥희 지음 | 열화당 | 256쪽

 

작품들 내부의 연결망을 밝히다
새로운 헤게모니 창출 의도는 없어

학제간 접근의 당위성이 운위되기 시작하고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개인으로서 분과 학문의 벽을 넘어서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사학자인 필자가 무용사 분야에 대한 책의 서평을 쓸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역사 과목이라면 영 지루했다”는 문장으로 시작된 이 책이 “미래만큼이나 낯선 과거”를 헤짚어 가며 춤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물이건, 사람이건, 사태이건 장기지속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만 본질이 드러난다는 역사학자의 믿음이 춤처럼 순간 속에서 빛나는 예술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것은 얼핏 아이러니처럼도 느껴진다.

이 책은 1832년 작인 「라 실피드」에서 그리고 2000년 작인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에 이르기까지 세 편의 19세기 작품, 일곱 편의 20세기 작품, 그리고 두 편의 21세기 작품을 연대기 순으로 다루고 있다. 이 12개 춤의 선택 기준에 대해 저자는 “별자리 찾기”라고 표현한다. “낡고” “편향적”인 별들을 연결함으로써 기존 “춤의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매너리즘이란 물론 서양·백인·남성중심의 서사를 뜻한다. 흑인의 서사를 담은 춤이 두 편 선택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성준 학춤이 포함되어 있고, 로이 풀러, 캐서린 던햄 등 다섯 명의 여성 안무가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저자에게 동양·비백인·여성을 또다른 주역으로 내세워 새로운 헤게모니를 창출하려는 의도 따윈 전혀 없다. “살아남은 작품들의 생애사”라는 부제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단지 각각의 춤을 그 탄생에서부터 성장, 발전,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망각 내지 소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안에 담아 묵묵하고 성실하게 드러내 보여줄 뿐이다. 또한 참신한 저자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 일견 관련성 없어 보이는 작품들 내부의 연결망이 드러난다. 그 결과 러시아 정체성 찾기의 일환으로 제작된 「불새」는 한국 민족 발레 「심청」, 「왕자 호동」과 만나고, 서양의 백조 춤과 동양의 학춤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 드러내

이 12개 춤의 생애사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역사학자인 필자에게 흥미로운 것은 무엇보다도 춤이 창작되고 공연된 역사적 상황을 풍성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전히 귀족의 세기이면서 동시에 부르주아의 세기였던 19세기의 이중성은 춤의 역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문화적 패권이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이전되어가는 과정은 “귀족들의 중요한 활동”이던 발레가 전문가의 영역으로 등극하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의 데이터를 스무 가지 방식으로 조합한 ‘동시발생적 오브제’ 중에서 <정렬주석(AlignmentAnnotations)> 사진 = 열화당

발레, 귀족에서 전문가 영역으로

세계대전과 평화, 냉전 대립과 극복, 인종 갈등과 화해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20세기의 역사가 춤을 통해 드러나는 양상도 매우 흥미롭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프로젝트를 위한 주요 수입품이었던 프랑스 발레가 러시아 문화의 DNA가 된 끝에 스탈린마저도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를 소비에트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가하면 1951년에 초연된 「사우스랜드」의 경우,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쓴 끝에 린치를 당해 사망한 흑인 노동자의 운명을 다룬 춤 자체뿐만 아니라 “그 춤을 춘 대가”로 정치적인 탄압과 경제적인 곤궁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안무가 캐서린 던햄의 인생 드라마 자체가 인종차별을 제도화하던 짐 크로우 법의 세계를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춤에 드러나게 될 21세기의 특징은 무엇인가. “발레의 디엔에이에 깊이 새겨져 있던” 아름다움 대신 “추를 전면에” 내세운 천재 니진스키로 인해 춤이 최초로 아름다움의 족쇄를 벗어나게 된 것은 1913년이었고, 로이 풀러가 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의상과 조명을 춤에 끌어들인 것이 1920년대였다. 그나마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시나리오를 거부하는 “트리오 A”의 춤은 원전과 변이의 경계마저 없애 버렸는가 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심이나 주제가 없고, 예측 가능한 전개도 없고”, “그저 잘 훈련된 무용수가 움직일 뿐”인 커닝햄도 춤의 외연을 한껏 넓혔다. 춤을 한 덩어리 데이터로 치환시키는 데 성공한 포사이스의 시도를 뒤집을 경우, 이제는 데이터를 춤으로 치환시키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인 것일까.

이처럼 21세기가 어떤 도그마나 어떤 고정관념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세기가 되리라는 것은 20세기 춤의 역사를 통해서 이미 예비된 바 있다. 이러한 허허벌판에서 선 21세기의 무용수들이 시대정신을 어떤 방식으로 구현하게 될지 기대감을 갖고 지켜보아야 할 성싶다.

문수현 한양대 교수·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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