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는 순전히 국가와 국내 대자본의 힘으로 조성됐다.”(『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41쪽)
70년대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이 터를 잡아 산업을 일으켰고 외지의 노동력이 유입돼 도시를 이뤘다. ‘조선소 두 개로 먹고 사는’ 산업도시의 탄생이다. 이후 거제 시민 중 조선소에서 일하는 비율은 한때 50%를 넘겼다. 조선산업의 위기는 곧 거제의 위기였고 산업정책의 실패는 곧 거제의 실패였다. 위기와 실패가 겹친 2015년 조선업 구조조정과 ‘대우조선 공적자금 지원’으로 거제의 악몽은 가시화된다. “지역민 모두가 산업을 매개로 ‘어우러졌던’ 삶”이 실은 “봉급을 따박따박 지급하는 조선소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269쪽)는 사실이 드러났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사회학과)는 2011년부터 2016년 사이에 대우조선에 있었기 때문에 그 시절 거제를 관찰할 수 있었다. 기업과 조직 문화에 대한 사회학도의 호기심, 공부를 잠깐 쉬고 학비를 벌어보자는 결단, 대우조선 합격과 거제 발령이라는 우연이 빚어낸 결과였다. 연고도 없이 내려간 낯선 땅에서 5년을 보내고 양 교수는 구조조정의 절정기에 회사를 나왔다. 이후 당시에 보고 겪은 것을 기록과 분석으로 엮어 2019년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오월의봄)를 썼다.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상과 한국사회학회 학술상을 받았다.
“중공업 가족 프로젝트는 애초에 배제와 포섭을 전제로 한 프로젝트였다.”(114쪽) 책의 1부를 매듭짓는 결론이다. 산업을 바탕으로 끈끈하게 묶어낸 ‘중공업 가족’이라는 서사는 사실 “하청 노동자를 배제하고 여성의 공간을 결혼 생활의 영역에 한정 지어온” 불완전한 꿈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양 교수의 관심은 손가락질할 대상을 찾기보다 맥락과 원인을 더 정확하게 드러내고 대안을 도모하는 데 있다. 사태의 겉모습만 보고 “귀족 노동자 운운하며 이 모든 책임을 조선소 노동자들에게 돌리는 것은 너무도 불합리한 일”(307쪽)이라는 문제의식이 책을 쓰는 동력이 됐다. 후속작으로 산업도시 울산에 관한 책을 쓰다가 서울에 올라온 그를 지난달 29일 합정동 카페에서 만났다.
△ 시간이 꽤 지났다. 에필로그에도 ‘거제와 한국조선업의 위기는 일단락된 상황’이라고 썼다. 상반기 내로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 인수가 마무리될 거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현 상황을 진단한다면.
“두 가지를 분리해야 할 것 같다. 산업을 보자면 조선업은 아직 어려운 상황이다. 2018년부터 나아지고 있었는데 전염병이 퍼졌다. 배는 사람 만나서 대면으로 협상하는 과정이 많은데 그게 안 되니까 발주가 많이 늦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괜찮을 거다. 중국은 잘 못하고 한국은 잘 하는 LNG 선박을 수주할 수 있으니. 다만 2000년대 중반기 같은 초호황은 이제 없다. 중국 경기가 폭발하고 해양플랜트도 잘 되고 유조선, 컨테이너선 발주가 쏟아지던 그런 호황은 없다. 축소지향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지가 목표인 그런 산업이 됐다. 산업의 성숙기가 온 거다.
문제는 거제다. 요즘 울산 연구도 하고 있는데 2015년이 분기점이다. 부산, 울산, 경남 인구가 줄기 시작한 해다. 또 조선업 구조조정이 정점이었다. 일자리가 없어서 사람이 줄고, 출산율이 떨어지고, 이런 상황이 전혀 개선이 안 됐다. 호황의 핵심이던 해양플랜트(해양 천연자원 시추 구조물)는 이제 기름값이 낮아 발주가 안 난다. 조선소 노동자들이 늘었던 이유는 해양플랜트 때문이었다. 자동화도 안 되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으니. 추산하자면 15년 이후로 5~6만 명 정도는 일자리를 잃었다고 봐야 한다. 거제에 있는 두 조선소에서만. 대부분 사내 하청, 혹은 ‘물량팀’이라고 부르는 초단기 노동자들이다. 그 자리를 복구하기는 쉽지 않다.”
△ 해양플랜트는 완전히 저물었다고 봐야 하나.
“기름이 너무 싸다. 중동에서 캐면 배럴당 한 20불, 셰일오일이 요즘 25~30불인데 바다에서 캐면 70불 정도 된다. 유가는 40~50불 언저리인데. 그러니 (바다에서) 캘 이유가 없다. 유가가 폭등해 호황이 오는 일도 없을 것이고, 유가가 오른다고 해도 기름보다는 전기나 수소로 수요가 몰릴 것이다.”
△ 산업도시 거제를 혁신하는 일은 지역균형의 문제이기도 하다.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서울의 힘을 견제할 ‘메가 시티’를 동남권 지역에 조성해 플랫폼을 분산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엊그제도 경상남도 메가시티추진단 관련 회의에 도정자문위원으로 들어갔다 왔다. 부∙울∙경 동남권을 잘 엮어내는 메가시티 구상에는 찬성하는 편이다. 거제라는 도시를 자족할 수 있는 도시로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렵다. 갑자기 서비스 산업 유치한다고 서울이나 부산처럼 되지 않는다. 서비스, 공공부문, 대학 캠퍼스는 부산에 두되 연구개발단지는 그 접점인 양산, 김해에 유치하고 연결망 강화하는 식으로 가야 한다. 인프라 투자를 하면 가능하다고 본다. 문제는 그것만으로 수도권보다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느냐, 그리고 그 많은 예산을 거기에 쏟아야 하는 이유가 뭐냐, 여기에 대한 논리는 조금 더 보강될 필요가 있다. 행정통합에 대한 법률은 통과가 됐지만 아직은 구상하는 단계다.”
△ 산업도시 재생산을 위해 가장 시급한 조치가 “충분한 여성 엔지니어 채용”이라고 썼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번에 울산 책에는 이렇게 썼다. ‘부∙울∙경의 산업 모델은 산업가부장제다.’ 산업구조, 일자리, 성 역할을 강제하는 시스템이다. 굉장히 견고하다.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가 하고 있듯 연봉을 많이 줘서 우수한 인재들을 유치했다고 치자. 그 젊은 남성 엔지니어들한테 ‘왜 주말마다 서울로 가냐’ 물어보면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배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두 번째는 ‘결혼이 하고 싶다.’ 여자친구가 거제로 안 내려온다는 거다. 다시 그 여성들에게 물어보면 ‘거제나 울산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곧 경력단절’이라고 한다. 경력단절 맞다. 이 사람들이 갈 만한 산업 영역이 없다.
엔지니어 일자리 중에도 여성 일자리가 별로 없다. 생산직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무직, 기술직(엔지니어) 포지션에서 여성을 안 뽑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최소한 대학에서 뽑는 성비만큼은 뽑아야 한다. 공과대학에서 30% 이상 뽑는데 여기는 10% 이내로 뽑으니까. 이런 불균형을 바꾸는 게 생각보다 큰 기여일 수 있다. 흔히 ‘청년에게 일자리, 여성에게 정주여건’이라고 하는데 저는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에게 일자리, 청년에게 정주여건’이다. 이 도시는 거꾸로 돼 있다. 청년은 오매불망 바라는데 ‘젠더’라는 필터가 없으면 해석도 안 되고 문제도 안 풀린다.”
△ ‘산업가부장제’라는 표현은 책에 나왔던 ‘남성생계부양모델’보다 강화된 표현인가.
“남성생계부양자경제가 산업가부장제의 하부구조다(웃음). 마르크스식으로 얘기하면 그게 토대인 거고 상부구조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인 거다. ‘여자애들은 그냥 서무나 하다가 시집가면 돼’, ‘남자 기 죽이면 안 돼’, 이런 생각이 팽배하다. 실제 기 죽이면 안 된다. 그렇게 벌어 오는데. 그런 경제고 그런 사회다.”
△ 울산에 대한 책은 어떤 내용인가.
“이번에는 실제 (직장을) 다니면서 쓴 책은 아니다. 먹물이 돼 가지고(웃음), 더 이론적이다. 1년 정도 매주 하루 이틀 이상 울산에 다니면서 인터뷰도 하고 공장도 보고 젊은 친구들 노는 데도 좀 가고 그렇게 필드 작업을 했다.
울산이야말로 국가가 총력전으로 지은 도시다. 중공업 산업 도시의 ‘프로토타입’이다. 창원, 거제는 울산의 후속작이다. 시제품이 폐기 안 되고 살아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도시를 보는 일이 전체 궤적을 파악하는 데 의미가 있다.
‘산업가부장제’는 울산을 설명하기 위해 쓰는 단어다. 부∙울∙경이 대동소이하긴 하지만 그래도 구별이 된다. 부산, 창원은 여성이 일하는 도시다. 남성생계부양모델이라고 할 수 없다. 반면 거제나 울산은 철옹성이다. 그런 차이를 보는 거다.”
△ ‘가짜뉴스 퇴치’ 유튜브 채널 ‘헬마우스’를 운영하는 ‘새로운소통연구소’에도 참여하고 있다. 어떻게 함께하게 됐나.
“친구들이다. 미디어업 종사자, 전직 보좌관, 글쟁이, 전업 유튜버… 별 이상한 인간들이 다 모여 있다. 저는 공부해야 하는데 단톡방이 늘 시끄럽다(웃음). 2019년에 유튜브 가짜뉴스가 굉장히 화두였다. (뛰어들어서) ‘똥 묻히고 싸울 거’라고 하더라. ‘알아서 해라’ 했는데 ‘전화하면 잘 받으라’라더니 그대로 영상에 참여시킨 게 헬마우스 채널이다.
하다 보니 느껴지는 게 있었다. 이제 다른 종류의 정치, 혹은 다른 종류의 사회적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만든 게 새로운소통연구소다. 헬마우스가 비판에 초점을 둔 ‘뚝배기 깨기’ 공격 중심이라면 새로운소통연구소는 다시 대의를 만들고, 대표성의 정치에 대한 메시지를 고민하고, 다른 종류의 분석, 해석, 아젠다를 생산하고자 한다. 아직 시작 단계다.”
△ 새로운소통연구소에서 공저한 책(『추월의 시대』, 메디치)도 나왔다.
“『추월의 시대』에서는 ‘논의의 지점’이 되는 축을 옮겨오고 싶었다. 우리가 지금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민주주의가 아직 공고하지 않았을 때, 산업화가 미진했을 때 개도국 단계에서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에 가깝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겪는 모든 현상을 다 겪고 있다. 여기에 압축성장을 통해 만들어진 조직문화, 과로 등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이걸 그냥 ‘헬조선’, ‘우리는 아직도 선진국이 안 됐어’ 이렇게 해서는 풀리지 않는다.”
△ 논의의 지형을 옮긴다는 건?
“예를 들어 공정성 문제를 보면, 대다수 취업전선에서는 공채가 다 없어지는 게 좋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다가 중견기업 가고, 중견기업에서 스타트업 거쳤다가 대기업도 가고, 이런 게 건강한 노동시장 모델이고 한국도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자꾸 게임을 공정으로 몰고 가면 다 고시 봐야 될 것 같고, 공무원 해야 할 것 같고, 아니면 죽을 것 같고, 불필요한 공포와 분노를 만들어 싸우게 된다. 그런 지평을 바꾸고 싶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