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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저지르고 말았다, 인문학 창업
결국 저지르고 말았다, 인문학 창업
  • 양진오
  • 승인 2021.02.09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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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오의 거리의 대학 ⑤ 

“경계를 넘어야 했다. 어떤 경계를 말하는가. 
인문학 배움의 경계를 말하는 거다. 
더 중요하게는 강의실 인문학의 경계를 깨야 했다. 
변화하는 세상과 대화하지 않는 강의실 인문학. 
반길 학생이 없다.”

토요일 오후의 도서관은 적막했다. 나는 그 적막을 즐겼다 싶다. 토요일 오후, 인적이 끊긴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을 꽤 읽었다. 소설 읽기의 리스트는 대충 이렇다. 염상섭의 『만세전』, 『삼대』, 이기영의 『고향』,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등. 읽기 리스트에 올려진 소설은 더 있었겠다 싶다. 조세희, 이문열, 강석경의 소설 등도 읽었다. 이렇게 읽으며 국문학 전공에 입문했다. 1980년대 중반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읽기 리스트의 변화이다. 

교수의 시간과 학생의 시간

2000년대의 국문학과 전공 수업 강의실을 상상해 보자. 교수가 영혼을 끌어모아 수업하는 강의실을. 그 교수의 입에서 염상섭, 이기영, 박태원이 차례차례 나오고 있다. 학생들의 반응은 어떨까? 호기심 어린 반응일까? 무덤덤한 반응일까? 대개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일 게다. 강의실에 두 개의 시간이 흐르는 까닭이다. 교수의 시간과 학생의 시간 이렇게 두 개의 시간이. 
교수는 염상섭과 이기영의 시간에 고착되어 있다. 그래 이 소설이 재미는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국문학 전공 학생이라면 재미를 떠나 읽어야지 이렇게 교수는 말하고 있다. 학생들은 그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 수업을 듣는 바람에 순간 멈춘 게임 그리고 업데이트된 웹툰을 어서 확인하고 싶은 게 학생 마음이다. 웹소설, 장르문학, 웹드라마를 보고 읽고 싶은 거다. 이게 학생들의 시간이다. 

이 시간의 격차를 언제부터 의식하게 된 걸까? 두 개 시간의 교집합을 찾든 학생들의 시간을 더 공부하든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시간의 격차를 인정해야 했다. 아니 인정이란 표현도 우습다. 인정이라니? 내가 뭐라고. 선생인 나도 장르문학, 웹툰, 웹소설, 웹드라마를 보고 읽어야 하는 거다. 학생들에게 선생의 읽기 리스트를 먼저 말할 게 아니다. 그들의 리스트를 먼저 봐야 하는 거다. 시간의 격차가 새로이 구성한 읽기 리스트의 변화를 순리로 받아들이고 인문학의 진화를 성찰해야지 싶었다. 이런 마음으로 강풀의 웹툰을 보게 되었다. 2000년대 초반의 이야기이다. 어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빠져드는 거다. 

다음 웹툰에 연재된 강풀의 <아파트>는 이렇게 시작을 알린다. ‘어느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들… 그리고,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강풀의 <아파트>는 자기 경계에 갇힌 아파트 주민들의 단절과 소외가 일으킨 공포를 감각적인 이미지로 이야기하는 웹툰이었다. 한 공간에 산다고 하여 더불어 산다는 게 아니라는 거다. 이 주제는 지극히 문학적이다. 강풀의 <아파트>는 다중 시점으로 스토리가 구성된다. 이 방식 또한 지극히 문학적이다. 강풀의 <아파트>는 그림으로 그린 문학이었다. 그 수준이 결코 문학에 뒤지지 않았다. 

인문학 배움의 경계를 넘어야 했다

경계를 넘어야 했다. 어떤 경계를 말하는가. 인문학 배움의 경계를 말하는 거다. 근대문학은 배움의 대상이며 웹툰은 그렇지 않다는 경계를 깨야 했다. 더 중요하게는 강의실 인문학의 경계를 깨야 했다. 변화하는 세상과 대화하지 않는 강의실 인문학. 반길 학생이 없다. 이런 일이 있었다. 대구 원도심을 답사하다 겪은 일이다. 미로 같은 골목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만나게 된 카페였다. 카페 상호가 ‘인문공학’이었다. ‘인문공학’이라니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그런데 의구심은 내 머리에서 곧 지워졌다. 그래 ‘인문공학’, 충분히 가능하다 싶었다.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마침 나를 따라 원도심 답사를 다니는 4학년 제자가 있었다. 연구실로 와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창업동아리를 만들자고. 예상대로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교내 인문 사회계열 학과에서 창업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는 사례는 없었다. 나 역시나 창업동아리는 지도 경험이 없었다. 비빌 언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교내 링크사업단에서 인문 사회계열 학과에 대해서도 창업동아리를 홍보하고 있었다. 4학년 제자에게 창업동아리 활동의 방향을 이렇게 제안했다. 원도심 답사만 하는 게 아니라 답사에서 취재하고 발견한 스토리를 독립출판물로 만드는 창업동아리 활동을 해보자고. 이 경험이 반복되고 축적되면 진로가 열릴 수 있을 거라고 조언했다. 이 제안에 동조한 학생들이 창업동아리 이름을 스토리공방으로 정했다. 그렇게 해서 원도심 매거진 <북성로대학> 시리즈 준비호가 탄생했다. 2017년의 이야기이다. 

창업동아리 스토리텔링공방 소속 학생들과 연구실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학생들의 손에 창업동아리 활동 성과물인 스토리텔링 맵 북 '향촌'과 원도심 매거진 '북성로대학'이 들려 있다.
창업동아리 스토리텔링공방 소속 학생들과 연구실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학생들의 손에 창업동아리 활동 성과물인 스토리텔링 맵 북 '향촌'과 원도심 매거진 '북성로대학'이 들려 있다.

창업동아리에서 회계처리도 배웠다

창업동아리 활동이 수월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강의실 인문학이 가르쳐 주지 않은 과제를 사업단에서 요구받았으니 학생들이 애로를 겪는 거다. 당장 지원 예산의 회계 처리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런데 이런 일도 한두 학기를 경험하니 실력이 생긴 눈치다. 나는 아마 이렇게 조언했다 싶다. 그 회계 처리도 공부라고. 졸업하기 전에 창업동아리 활동하며 회계 처리를 배웠다고 생각하자고 했다. 그래서 이 학생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2019년 교육과학기술부 산학협력 EXPO에서 창업동아리 스토리텔링공방 사례 발표를 하는 임언희 학생. 임언희 학생은 현재 졸업하여 대구 원도심 마을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 교육과학기술부 산학협력 EXPO에서 창업동아리 스토리텔링공방 사례 발표를 하는 임언희 학생. 임언희 학생은 현재 졸업하여 대구 원도심 마을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6월 교내 창업지원단의 지원을 받아 대구 남산동에서 ‘새새벽책방’이라는 상호로 창업을 했다. 독립출판 창업이다. 새새벽책방의 대표는 당황해하던 그 4학년 제자이다. 때마침 터진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세상에는 이렇게나 청춘들의 꿈을 훼방하는 변수가 많다. 코로나19 이후의 시간이 올 거라 믿으며 창업한 제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원도심을 답사하며 창업의 꿈을 키운 이 청춘들의 꿈이 아름답게 만개할 날이 올 거라 믿는다. 강의실 인문학, 이제 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인문학 전공 학생들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양진오 대구대 교수·한국어문학과
한국 현대문학과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다. 대구 원도심에 인문학 기반 커뮤니티 공간 ‘북성로 대학’을 만들어 스토리텔링 창작, 인문학 강연 및 답사, 청년 창업 컨설팅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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