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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적 신체
상상적 신체
  • 교수신문
  • 승인 2021.01.2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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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라 게이튼스 지음 | 조꽃씨 옮김 | 출판사 b | 319쪽

스피노자와 근대철학을 바탕으로 한 페미니즘 

이 책 〈상상적 신체: 윤리학, 권력, 신체성〉은 모이라 게이튼스(Moira Gatens)의 〈Imaginary bodies -Ethics, power and corporeality, 1996〉를 완역한 것이다. 게이튼스의 저작은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셈인데, 스피노자 연구와 페미니즘 저술에서의 그녀의 명성을 감안한다면 꽤 늦은 감이 있다. 게이튼스는 페미니즘 이론을 철학적 사유로 검토하고 그 난점을 철학적 아이디어로 돌파한다. 기존의 ‘젠더’ 개념을 비판하고자 정신분석학을 경유하고, 성적 상상계의 계보학을 제시하고자 스피노자, 니체, 푸코, 들뢰즈의 철학을 활용한다.

게이튼스가 이 책을 저술한 주요 배경과 목적은 20세기 후반 이래로 페미니즘 이론의 중심을 이루게 된 섹스/젠더 구별을 비판하는 데 있다. 로버트 스톨러는 ‘잘못된 신체에 갇혀 있다’고 믿는 트랜스섹슈얼의 존재를 설명하고자 ‘젠더’ 개념을 고안했다. 이는 생물학적이고 해부학적인 성별을 가리키는 섹스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성 관념을 가리키는 젠더의 구별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구별은 여성 종속적인 기존의 젠더 규범성을 비틀 수 있다는 면에서 획기적이었다. 하지만 게이튼스가 보기에 이 구별은 신체와 정신의 이원론적 개념을 답습하고 있다. 섹스/젠더가 전제하고 있는 신체/정신 더 나아가 수동/능동, 자연/문화 등과 같은 서구의 유서 깊은 이분법은 한 편의 항에 가치를 부여하고 다른 항을 억압하는 작용을 해왔다. 따라서 게이튼스는 ‘섹스의 대립물로서의 젠더’를 대체할 새로운 개념을 모색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상상적 신체’이다.

‘상상적 신체’ 개념은 스피노자의 일원론을 활용한 것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에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 존재하며, 정신과 신체는 유일 실체의 속성인 연장과 사유의 변용이나 표현일 뿐이다. 여기서 능동적인 정신이 수동적인 신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정신의 능동성과 신체의 능동성은 비례하며, 오히려 정신은 신체의 성격 및 상태에 의해 구성된다. 신체의 역량과 한계는 다른 신체들과의 지속적인 상호 작용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스피노자 철학을 토대로 게이튼스는 우리가 신체를 본질적인 것, 이분법적으로 성별화된 것으로 간주한다거나 여성 신체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를 갖는 것은, 또한 그것이 법과 제도 등으로 체현되는 것은 다양한 사회관계에 따라 다르게 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게이튼스는 신체의 역사적이고 역동적인 성격과 젠더의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성격을 제시하며 기존의 섹스/젠더 구별을 해체한다.

이 책은 총 3부로 이루어졌다. 제1부는 ‘신체 이미지’라는 정신분석학 통념으로 섹스/젠더 구별을 비판한다. 남성 신체 이미지가 근대 정치체 탄생과 결부되었다는 점과 여성과 남성의 신체 이미지의 반정립적이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이중성이 현재의 성별 억압에 복무했다는 점을 밝힌다. 게이튼스는 여기까지는 정신분석학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성별화된 신체와 조직체 간의 유사성을 이끌어내는 데 유용하지 못하다는 판단 하에 정신분석학과 결별한다. 제2부는 기존의 페미니즘과 게이튼스의 페미니즘을 차별화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스피노자의 일원론이 게이튼스가 주장하는 신체 페미니즘에 영감을 주는 바를 논증하고, 이러한 페미니즘이 자유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급진 페미니즘과 권력, 신체, 차이를 다루는 데서 갈라짐을 시사한다. 또한 당시 일종의 전략으로 제시됐던 본질주의의 위험을 경고한다. 제3부는 현재의 성적 상상계를 고찰한다. 스피노자 철학으로부터 권력 개념을 다시 정의하고, 현재의 사회관계가 형성된 데에 공동체의 책임을 강조한다. 당시 호주에서 벌어진 가정 폭력과 강간 사건 및 이를 대하는 사법부의 태도 속에서 발견되는 지배적인 관념을 지적한다. 그리고 시민 정체와 구성원들의 권력들 및 역량들이 맺는 관계가 포획과 효용이 아닌 윤리적 공동체를 위한 결합의 관계가 되기 위한 길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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