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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기만 하면 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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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강수
  • 승인 2021.01.29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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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기_『능력주의와 불평등』
박권일, 홍세화, 채효정, 정용주, 이유림, 이경숙, 문종완, 김혜진, 김혜경, 공현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28쪽

차별을 용인하고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한국식 능력주의의 실상 해부하기

 

 

능력주의는 간단히 말해 ‘능력에 따른 분배 시스템’이다. 이 체제가 작동하기 위해서 몇 가지 장치가 필요하다. 우선 시험과 평가. 개인의 능력을 수량화해서 줄 세우고 분류하는 작업이다.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근대 국가의 기본기에 해당하는 일이다. ‘복종하는 인간’을 길러내기 위해 권력은 시험과 평가로 사람을 규격화하고 자격과 등급을 부여한다. 일련의 구조에 대해 『능력주의와 불평등』(이하 ‘능력주의’)에서 채효정은 “평가는 정말로 우수한 사람을 걸러내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선별 결과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순응 장치”라고 풀이한다.

분배 게임에 참여한 모두를 순응시키기 위해서 하나가 더 필요하다. 공정한 경쟁이다. 게임의 룰이 공정했다고 믿을 때 참가자들은 결과를 수용하고 분류는 더 효율적이게 된다. 이때 공정성 신화는 “평가 권력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거짓말”(채효정)이 되고 “통제∙관리를 목적으로 평가∙선발하는 쪽의 이익을 위한 시스템”(공현)으로 기능한다. 공정성이란 능력주의의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난 몇 해 동안 쏟아져 범람한 공정담론을 정확히 읽어내기 위해서는 공정이라는 두 글자를 벗겨내고 너머의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들여다봐야 한다.

 

세습주의와 싸우는 세습주의

 

공정한 경쟁과 체계적인 평가로 능력을 판별해 보상과 자원을 배분한다. 능력주의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느껴진다. 불공정을 규탄하는 목소리들은 한국 사회에 이 합리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타당한 비판이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능력주의가 정상 작동하지 않는 사회다. 연고와 정실에 바탕을 둔 끌어주기, 연공제 위계 구조, 만연한 세습과 상속 등은 음양으로 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반능력주의적’인 기반이다. 애초 능력주의 자체가 봉건적 신분제에 대항하는 근대적 기획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한국의 전근대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박권일은 이처럼 “능력주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능력주의에 대한 문제 의식을 막아 선다고 지적한다. 능력주의를 통해 세습주의에 맞서야 하는 사회에서 능력주의가 문제라고 비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에는 극단화된 형태의 능력주의 역시 팽배하다.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제도적 개입을 ‘능력 없는 자들의 무임승차’로 프레이밍하는 혐오 정서, 수능 성적과 대학 서열을 깊이 내면화한 끝에 입에 붙은 ‘지잡대’, ‘지균충’ 등 비하 언어에서 ‘선 넘은’ 능력주의가 관찰된다. 능력주의의 측면에서 일베와 명문대생의 세계관 사이 거리는 멀지 않으며 이 태도는 복지와 연대에 인색한 한국 사회 전반에 옅게 투영돼 있다.

 

2020년 8월 1일 인천공항공사 노조 주최로 열린 투명하고 공정한 정규직 전환 촉구 문화제사진=연합
2020년 8월 1일 인천공항공사 노조 주최로 열린 '투명하고 공정한 정규직 전환 촉구' 문화제 사진=연합

 

정리하면 한국은 능력주의가 부족한 동시에 넘치는 곳이다. 박권일은 과거 <한겨레>에 쓴 다른 글(「과잉능력주의」, 2016)에서 이 이중적 상황을 가리켜 “’과소’ 능력주의와 ‘과잉’ 능력주의의 공존”이라 평한 바 있다. 이어서 그는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양자가 “’더 많은 불평등’을 생산하는 논리”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고 짚는다. 기존의 비합리적 세습주의뿐 아니라 능력주의 역시 본질적으로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기제라는 말이다. 같은 사태를 정용주는 『불평등의 세대』(이철승, 문학과지성사, 2019)를 인용해 이렇게 요약한다. “현 세대에서의 공정한 경쟁이 다음 세대에는 불평등으로 대물림 된다.”

 

능력주의라는 ‘지적 인종주의’

 

능력에 따라 분배된 부와 지위는 다음 세대의 출발점을 규정짓는다. 능력주의는 새로운 세습주의로 미끄러진다. 요 몇 년 사이 언론이 가장 공들여 질타한 공정사회에 대한 배신은 ‘조국 사태’일 것이다. 지난해 12월 내려진 정경심 교수의 1심 판결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 성실히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에 허탈감과 실망감을 야기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할 수 있다. 공정한 경쟁을 회복하면 세습주의는 타파되는가? 공정사회는 더 나은 사회인가? 능력주의, 즉 능력에 따른 분배 시스템은 정의로운가? 이 대목에서 『능력주의』에 수록된 열 개의 시선은 교차한다.

 

지난 몇 년간 출간되거나 한국에 번역된 능력주의를 다룬 저작들. '능력주의(meritocracy)'(가운데)는 특히 1958년 발표된 디스토피아 풍자 소설로 '능력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제시한 책이기도 하다.
지난 몇 년간 출간되거나 한국에 번역된 능력주의를 다룬 저작들. '능력주의(meritocracy)'(가운데)는 특히 1958년 발표된 디스토피아 풍자 소설로 '능력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제시한 책이기도 하다.

 

즉, 능력주의에 대한 경고다. 이 이데올로기는 경쟁피라미드 구조 속에서만 유지된다. 여기에는 불평등을 산출하고 강화하는 디스토피아의 징후가 깃들어 있다. 또한 능력주의는 차별을 용인하고 조장하는 인종주의적 성격도 갖는다. 홍세화는 닫는 글에서 피에르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려 ‘지적 인종주의’라는 명명을 내놨다. 능력주의는 각자도생과 양극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아포칼립스’의 근간을 떠받드는 이념이다. 작년 9월에는 마이클 샌델이, 2년 전에는 토마 피케티가 나름의 방식으로 천착한 사안이며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용어의 저작권자 마이클 영이 72년 전 예단한 미래다. 미래는 반쯤 현실이 됐고 능력주의의 대안 찾기 프로젝트에 한국도 막 걸음을 떼려는 참이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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