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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산책, 쓸모없음의 쓸모
문학과 산책, 쓸모없음의 쓸모
  • 정민기
  • 승인 2021.01.29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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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176쪽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쓸모를 기대하지 않아 가치를 갖는 산책
현실 도피 아닌, 믿음 확장으로써 환상

“삶 자체의 조건에 쫓기는 동물과 다르게 인간은 유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꿈꿀 수 있다. 인간만이 몽상 속에 잠겨들 수가 있다. 몽상은 억압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몽상은 인간이 실제로 살고 있는 삶이 얼마나 억압된 삶인가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문학은 그런 몽상의 소산이다.”

문학 평론가 김현(1942~1990)의 문장이다.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문학은 쓸모가 없어서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고, 덕분에 "욕망의 노예"가 된 인간의 삶을 "날카롭게 고발"할 수 있다고 말이다. 

김현의 문장에서 "문학"을 "산책"으로 바꿔보자. 그러면 『시와 산책』의 저자 한정원의 문장이 된다.

“산책의 쓸모를 생각하고 걷는 사람을 ‘산책자’라고 부르는 건 내키지 않는다. (…) 팔을 직각으로 크게 흔들며 갑자기 뒤로 걷는 산책자는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산책 혹은 소요의 가치는 쓸모를 기대하지 않아서 귀해지는 쪽이다.”(155쪽)

타인과 잠시 일치해지는 순간

한정원은 산책을 하면서 죽어가는 벌레 곁에 잠시 있어주고, 길고양이를 보살핀다. 나무껍질이나 돌멩이를 한가득 주워오기도 하고, 지난 밤의 꿈을 복기해본다. "모든 방향을 만끽하고 싶은 나비"처럼 이리저리 걷느라 산책 시간이 툭 하면 길어진다. 

유용성의 관점에서 산책은 시간을 "탕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산책에서 돌아온 그의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은 없다. 

“(산책할 때) 나는 진짜 ‘나’와 가장 일치한다. 또한 자연이나 스치는 타인과도 순간이나마 일치한다. 그 일치에 나의 희망이 있다. 부조리하고 적대적인 세계에서 그러한 겹침마저 없다면, 매 순간 훼손되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견딜까.”(157쪽)

기차가 더는 멈추지 않는 폐역에 가본 적 있다. 그곳에서 난생처음으로 기차역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폐역이 아니었다면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을 모서리 타일 조각까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정원이 말한 "진짜 나"는 그 폐역을 닮았다. 존재의 목적을 잃자 존재 자체가 눈에 띈다. 걷는 목적을 비우자 비로소 걷는 행위 그 자체가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김현이 말한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와 닮았다. 능률과 효율에 쫓기지 않는 상태, 욕망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 말이다.

‘문과 창문’을 만드는 일

저자는 대학생 시절 전공을 소개할 때 애를 먹었다고 한다. 문예창작과를 줄여서 ‘문창과’라 부르는데, 이 줄임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문과 창문’을 만드는 학과에 다닌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졸업 후 시간이 흐르자 그는 이렇게 쓴다.

“문학은 결국 문과 창문을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나보다. 단단한 벽을 뚫어 통로를 내고, 거기 무엇을 드나들게 하고, 때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살피는 일.”(111쪽)

여기서 말하는 "단단한 벽"은 수많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겠지만, 그 중 ‘유용성 벽돌’이 유난히 눈에 띈다. 젠가를 하듯 그 벽돌을 손가락을 밀어빼니 빈 자리에 네모난 구멍이 생겼다. 구멍 밖으로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인다. 구멍 앞을 지나가는 순간의 말과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앞뒤 맥락이 희미해진 짤막한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한정원은 "듣지 못한 이야기의 나머지를 상상으로 채워 넣는다." 그래서 그는 "삶에 환상의 몫이 있다"고 말한다. 환상은 진실을 회피해 숨는 일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기에. "잃은 목소리"를 되찾는 일이기에. 그리고 그것이 바로 문학이기에.

정민기 기자 bonsense@kyosu.net

시와 산책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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