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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마초’ 복귀의 볼온한 징후들
[문화비평] ‘마초’ 복귀의 볼온한 징후들
  • 박명진 연세대
  • 승인 2001.05.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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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03 13:22:55

박명진 / 연세대 강사·국문학

지금 우리나라 영화에는 두 부류의 남자들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소심하고 무기력하며 비굴하기까지 한 고개 숙인 남자들, 그리고 불굴의 의협심과 싸나이 정신으로 이 시대의 모든 나약함을 한번에 날려버리는 마초(macho)들. 서로 다른 이 두 행렬의 정점에 각각 ‘아줌마’와 ‘친구’가 자리잡고 있다. ‘아줌마’는 나약하고 위선적인 룸펜 인텔리겐차 ‘장진구’를 통해 역사를 호령하던 사나이들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스크루볼 코미디(Screwball comedy)’풍으로 풍자한다.

그러나 몰락해가는 소시민의 이러한 내러티브들은 ‘IMF 서사학’ 밑에 가라앉고, 그 대신 비밀요원으로, 비무장 지대의 병사로, 깡패의 무용담으로 솟아오른다. 영화 ‘친구’류의 남성 영화들은 고개 숙인 자의 영혼을 위한 呪物(fetish)이자 수컷들의 비망록이다. 흥미롭게도, 이들 영화에는 ‘가족’이 발 디딜 틈이 없고, 비장하게도 그림자처럼 죽음이 따라다닌다. 이는 IMF, 또는 난장판 속의 전망 부재에 대한 치명적 나르시시즘을 구축한다. 상실된 것, 붕괴된 것의 회복을 열망하는 역설적 몸짓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이들 사나이들의 영웅담 속에서 가족이나 여성들은 내러티브의 담장 밖으로 밀려나 스쳐 가는 풍경이 된다.

난세에는 영웅이 탄생하는 법. 6.25 이후 민족 최대의 국난 앞에서 역사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사’들 뿐이다. 여성 취향의 멜로드라마에 있어서도 여성들은 단지 가정의 회복이라는 가부장적 서사를 완성시키기 위해 강제 동원된 계열체적 기표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영화들에 가족주의는 있으되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영화들은 ‘대한민국 남성 잔혹사’의 시리즈물이 되고 ‘포즈와 스타일’을 위한 가부장적 미장센을 지향한다. 이것은 ‘대화’의 서사학보다는 ‘힘’의 정치학을 중심에 놓는다. 영웅을 위한 오딧세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인간의 길’이 보여주는 남성성과 민족의 상상적 동일시. 민족주의 서사는 마초적 영웅을 원한다. 그 민족주의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는 심문하지 않은 채.

폭력과 야비함을 문맥 속에 숨기면서까지 드러내고자 하는 사나이들의 우정, 의리, 용기 같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박찬호와 박세리와 이봉주에 동일시됨으로써 위축된 권위와 자존심을 치유하려는 욕망과, 강초현과 O양과 백양으로부터 관음증을 충족시키려는 욕망으로 착종되는 이중성이다. 명백한 분열증으로서의 이 시대 남성성은 관음주의와 완고한 가부장주의를 교활하게 줄타기한다. 그래서 ‘친구’의 준석이 상택에게 “다음에도 아새끼들 팰 일 있으면 확실하게 조지아 된다이. 다음에 눈만 마주치도 오줌을 찔끔 싸게끔 만들어나야 되는기라. 아예 용서해주고 같은 편으로 만들든가, 아니믄 차라리 빙신을 만들어삐라. 그래야 뒤탈이 없다”고 한 대사는, “정권은 법에 우선한다”고 외치면서 집단 폭력을 가하는 내용의 ‘시네마 베리테(Cinema verit )’ 위에 겹쳐진다. 이 시대, 폼 나는 사나이들의 무용담은 역사의 진정성마저 무책임하게 관음함으로써 사회적 맥락을 말끔하게 지워버리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한쪽에선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외치고, 내 안의 파시즘을 몰아내자고 소리치며, 가족주의는 야만이라고 주장하지만, 아직 이 시대는 마초들을 꿈꾸고 재생산하고 몽타주하는 불안의 시대이다. ‘아줌마’가 남성들이 누운 관 뚜껑에 마지막 못질을 하기가 무섭게, 관 뚜껑을 열어제치며 뛰쳐나오는 한 무리의 마초들이 있다.

민족 서사는 곤경을 넘기 위해 여성들을 추켜세웠다가 이내 폐기처분해 버린다. ‘쉬리’나 ‘해피엔드’에서처럼 남성의 영역을 넘보거나 남자들이 그어놓은 금기의 선을 넘는 자들은 처단된다. 따라서 폭력을 동반하는 마초들의 서사학은 언제나 평화로운 질서의 회복이라는 내러티브 구조를 반복한다. 그리고 이때의 질서 회복 의지는 고향 모티프의 노스탤지어를 통해 성급하게 현실로부터 시선을 돌리게 한다. 앙드레 바쟁은 사진으로서의 영화예술을 ‘미이라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과거의 평화와 흔적을 영원히 보존하고 싶은 욕망은 현실을 재현해 내는 영화의 내밀한 속성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쟁은 영화가 인간과 외부세계를 연결시켜주는 ‘현실의 지문’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남성적 담론에는 어떤 현실이 ‘지문’으로 찍혀 있는 것일까.

 혹시 의리, 우정, 용기, 배신 같은 독백적인 어투로 이 시대의 복잡하고 다양한 갈등의 균열을 하나로 봉합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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