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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시대, 교수는 무엇으로 사는가
격변의 시대, 교수는 무엇으로 사는가
  • 정리: 안길찬 기자
  • 승인 2001.04.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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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9주년 및 지령 2백호 기념 특집기획좌담
변화가 휘몰아치는 격변의 시대, 모두가 지식정보사회의 유토피아에 들떠 있다. 하지만 정작 지식을 생산·전파·전수하는 교수들의 모습은 잔뜩 일그러져 있다.
변화의 속도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그것이 거북하고 불편하기 때문도 아닌 것 같다. 교수의 바램은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하고싶은 연구에 열중하고 학생들이 자신의 강의를 즐겁게 듣고, 건강한 사회인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교수들의 이 소박한 바램도 현실에선 먹혀들지 않는다. 그럼 우리시대 교수들은 정말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본지는 흔들리는 교수의 정체성 문제를 짚어보기 위해 각 학문분야별에 포진한 40대 학자 다섯명과 자리를 같이했다.


일시 : 2001년 4월 7일 오후 4시
●참석자 : 박순성 동국대 교수(본지 편집기획위원, 사회),
성경륭 한림대 교수(사회학), 홍원식 계명대 교수(철학),
이홍균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이순일 아주대 교수(물리학)



대학 관료화와 기능주의 한 목소리 경계


경영논리에 상처입은 자의식…학문 즐거움 붙들고 고통 치유


 ◇ 힘든 시절이다. 우리시대 교수는 정말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40대 학자들이 자리를 같이했다.
박순성(사회): 요즈음 대학교수는 두 번 우울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재임용심사와 연봉협상 때이고, 두 번째는 강의를 마치고 나올 때라고 하더군요. 마치 벽을 놓고 강의하는 기분이라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홍원식: 지방대 교수들의 요즈음 심정은 아마 참담할 겁니다. 저도 상당한 절망감을 느낍니다. 학생들이 제 강의를 듣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학점을 따러 온 거죠. 그 뿐입니다. 제가 그것을 정확히 알고 있고, 학생들도 전혀 숨기지 않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교수의 학문은 학점 거래가 끝나면 증발해버리고 맙니다. 강의 점수 때문에 취직을 가로막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에 낙제점을 주지도 못합니다.

이홍균: 가장 큰 원인은 대학 서열화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학생도 교수도 뛰어넘을 수 없는 엄격한 심리적 규범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학생들 스스로가 그 기준에 맞춰 자신들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실제 우수한 학생들은 지방, 수도권 어디에나 있습니다. 학생들이 좌절하는 것은 모 대학 출신이란 꼬리표가 평생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마치 범죄자처럼 낙인을 찍는 거죠.

점증하는 강단의 위기


성경륭: 학생들과 마주할 때면 한편으론 절망감을, 다른 한편으론 약간의 희망을 느낍니다. 절망감은 학생수준에 관한 것입니다. 복수전공이 확대되면서 대학안에서도 학문의 서열화가 이뤄지고, 돈 안되는 학문에는 상대적으로 수준 낮은 학생이 몰립니다. 그 학생들은 전공은 33학점만 듣고, 나머지는 모두 영어, 컴퓨터, 경영·경제 등 실용적인 과목으로 채웁니다. 또 하나는 수업시간에 질의응답과 대화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희망적인 것은 창피한 일일지 모르나 기초학문이 장기적으로 취업과 사업적 성공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는데, 그러면 학생들이 조금씩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순일: 제가 가슴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좀 다른 것입니다. 학생들도 졸업 후 사회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학문적 호기심과 흥미만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경쟁력을 길러주는 것이 교수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가르치는 물리학도 다른 기초학문과 같이 어려운 형편입니다. 학부제 시행이후 대개 4학년쯤 되면 전공과목에는 학생들이 절반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 학생들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물리학이 정말 좋아서 남아 있는 학생들입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그런 학생들의 교육기회는 오히려 박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학은 자원을 배분한다면서 경영·정보통신 같은 소위 잘 나가는 분야에 집중 지원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특정 분야만 ‘엘도라도’라고 지목하지만 이면에서는 역설적이게도 개인의 이익이 침해당하고 있는 셈이죠.

박순성: 과거 대학교육은 엘리트와 전문인을 키워내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대학교육의 성격도 사회변화에 따라 크게 바뀌었습니다. 현행 대학교육의 성격을 어떻게 진단하고 계십니까.

이홍균: 대학이 많이 세속화된 것 같습니다. 세속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시장화가 아닌가 합니다. 과거 대학진학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봉사란 측면이 강조됐지만 근래엔 개인의 사회적 지위의 확보에 맞춰지고 있습니다. 급속한 시장화가 진전되면서 대학이 취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있고, 입신양명을 위한 방편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라 봅니다.

홍원식: 과거 대학생과 현재 대학생의 자기규정이나 인식이 크게 달라진 것 같습니다. 교육받는 주체가 그러니 교육자도 엘리트를 교육한다는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빈자리는 시장논리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교육자가 엘리트를 교육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가르칠 때와 직업인을 키운다는 의식을 가지고 가르칠 때는 그 자세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대학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말해줍니다.

성경륭: 대학 또한 사회적 변화의 충격에 놓여 있습니다. 문제는 이 흐름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느냐 하는 선택인데 제가 보기에는 문민정부 이후 지금까지 우리 정부가 선택한 것은 천박한 시장기제인 것 같습니다. 학부제가 대표적입니다. 이를 그대로 따라가다보니 학문하는 대학이 시장판으로 변질되고 있지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 과정에서 학문 자체의 즐거움이 사라지고 학문이 도구적 가치로만 인식되고 있는 점인 것 같습니다.

이홍균: 대학도 분명 자본주의 시스템에 연동되어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필요한 인물들을 배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점점 고도화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대학은 그러한 역할과 기능을 더욱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대학은 막스 베버식으로 말한다면 “영혼 없는 전문가만 만들어 낸다”고 해야겠지요. “영혼 있는 전문가”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영혼있는 전문가를 만든다는 것은 대학교육이 公개념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私적인 영역에 함몰돼 입신양면을 위한 것으로만 보면, 대학 본래의 목표, 목적, 사회적 기능 중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순일: 사익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노력을 극대화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공익에 반하지 않는다면 최대한 추구할 수 있게 보장해 줘야 합니다. 오히려 시장논리가 대학에 들어와 잘못 기능 한 점은, 공정경쟁이 되지 않고 독과점에 의해 시장이 좌지우지되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방향을 획일화한 데 있습니다. 예컨대 그쪽으로 가면 바다밖에 없는 데 모든 자동차더러 부산을 향해 가라는 것과 똑같은 거죠. 모든 차들이 한 곳으로만 가면 도중의 교통체증도 심한 법이고 목적지라고 생각했던 곳에 도달해 봐야 모든 운전자들이 만족할 수도 없는 거지요. 결국 중요한 것은 다양성입니다. 다양한 교육이 진행될 때 변화의 회오리에 휩쓸리지 않는 건강한 사회구조가 만들어집니다.

홍원식: 대학이 자본주의 시스템과 연계돼 있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휘말려 들어가 직업교육에만 열중하고 있기 때문에 위기라고 봅니다. 어차피 어느 정도 맞물려있기 때문에 변화는 불가피하지만, 문제는 지나치게 발빠르고 천박하게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경영원리에 빠져들면서 교육 기반이 크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대학은 어떤 경우에도 사회적 견제, 감시, 비판이라는 고유한 기능을 가져야 합니다.

박순성: 선생님들께서는 대학이 자본주의와 시장논리에 무조건 따라감으로써 고유한 기능을 살리고 있지 못하며, 이제는 이를 반성하고 시장과 거리를 둘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경륭: 미국처럼 자본주의 정신이 투철한 곳에서도 순수학문 활동은 보호·육성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시장기제가 작동하고 있지만, 대학 자체가 기초학문 중심으로 학부를 조직하고, 응용학문은 대학원에 집중 배치하는 방식으로 기초학문과 응용학문의 공존과 공영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독재시대부터 응용학문이 대거 학부 수준에 도입되었고, 최근에는 대학에 경영논리가 도입되면서 컴퓨터나 영어같은 도구적 학문과 경영학 같은 응용학문만이 판을 칩니다. 균형을 잡아줘야 할 정부까지 평가다 학부제다 해서 시장주의적 정책을 대학에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초학문이 고사위기에 몰리고 있는 것이죠.

시장논리가 초래한 학문간 불균형

홍원식: 기초학문이 무너지는 것과 더불어 응용학문도 절망적인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영문과의 경우만 봐도 학생들이 너무 많이 지원해 절망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많은 학생들을 받아들여서는 제대로 교육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빈사상태에 한쪽은 소화불량에 걸려 있는 셈이죠. 제도가 학문의 구조를 왜곡하면서 모든 학문을 죽여버리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제도는 항상 그 취지가 뭔가를 묻고, 확인하고, 공유해야 합니다. 학부제를 시행하면서도 우리 교수들은 왜 시행하는지, 그 전체 그림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냥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슨 능동적 에너지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순일: 제가 납득이 가질 않는 말이 대학에도 경영마인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영이 필요한 것은 회사입니다. 대학은 운영을 해야하는 곳이죠. 그 운영이 혁신적인 것이면 좋지만. 우리가 대학에서 기대하는 교육은 심지어 이공계일지라도 경영의 잣대 아래에서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경영의 시각에서 단기적인 이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부분을 잘라내다 보면 대학의 본령을 해칠 수 있습니다. 시장원리가 적용되는 부분은 물론 있죠. 그러나 모든 사회가 시장이어서는 안되고 그 한 예가 바로 대학이 아닌가 합니다. 시장과 경영이라는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히려니까 대학이 지금 이런 문제에 봉착했다고 생각됩니다.

박순성: 교수도 대학이라는 거대 관료조직의 부품으로 되어 가는 듯합니다. 교수의 업적평가, 행정조직의 체계화된 성과평가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것들이 정말 대학사회에 꼭 필요한 건지, 이러한 강압적인 제도변화가 대학사회의 자정력 상실 때문에 나타난 것은 아닌지요.

성경륭: 업적평가가 필요하고 교수들도 엄정한 자기기준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문제는 평가방식입니다. 논문 편수가 많다고 학문적 기여도가 높고, 탁월한 성과를 냈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얼마전 한 수학과 교수를 만났는데 일년에 논문 몇 편 쓸 수 있냐고 물었더니, 솔직히 제대로 된 논문 한 편 쓰기도 어렵다더군요. 그 분은 그래도 열심히 하는 학자의 한 분이었어요. 제 생각으로는 시장적 모델에 따라 점수로 계량화하는 것은 교수도 죽이고 학문도 죽이고 결국엔 대학도 죽이는 일이라고 봅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보상을 해주는 것은 타당합니다. 그러나 못하는 이들을 옥죄는 네거티브 시스템으로는 더 많은 부정적 결과가 나타날 것으로 생각됩니다. 처음 임용과정에서 엄격한 기준을 선발해 교수를 뽑고, 평가를 통해 잘 하는 분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포지티브 시스템을 도입하는 타당하다고 봅니다.

이순일: 제 생각에는 교수들의 책임도 큽니다. 양을 많이 요구하기 때문에 연구의 질이 떨어진다고 주장할 만큼 과연 모든 교수들이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냐는 것입니다. 양과 질 어디에 평가의 기준을 두는가 하는 면에서 아직은 질을 따질만한 수준으로 못 갔다는 것은 개선할 점입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평가를 부정해서는 곤란하다고 봅니다.

이홍균: 학문적인 연구가 타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테일러리즘의 부활이 아닌가합니다. 연구는 단순 반복적인 작업과는 달라서 타율적으로, 강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독일의 경우를 보면 타율적인 분위기에서 연구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연구를 하기 위한 더욱 발전된 제도의 개발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교육과정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매년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커리큘럼 하에서 매년 새로운 연구결과를 기대하기란 어렵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창의적 연구측면에서 새로운 과목을 교수가 개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홍원식: 교수 평가제의 저의는 그것이 바로 계약제나 연봉제와 연결되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관리자 입장에선 이 제도가 굉장히 효과적인 목적달성의 방법일 겁니다. 평가로 학문연구의 생산성이 제고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혹 생산성이 있더라도 기형적인 문제도 적지 않습니다. 논문을 중심으로 해서 평점을 매기다 보니 저술이 다 죽어버립니다. 저술 한편과 해외저널에 실리는 논문 한편이 같은 평가를 받으면 교수들은 당연히 논문을 택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저술활동에는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주어진 기간내에 업적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죠. 논문집 평가도 그렇습니다. 어느 특정 저널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다보니 작지만 중요한 성과를 내고 있는 연구소와 학회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제도의 실제 취지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점검하고 보완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 큰 문제가 야기될 것입니다.

교수평가제도, 무엇이 문제인가

성경륭: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분야별로 학문하는 방식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은 실험실에 앉아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고 결과를 얻는 방식이지만, 인문사회과학은 상당히 많은 학술활동이 소규모 아카데믹 서클을 통해 이뤄집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갑자기 SCI와 SSCI가 등장하고 정규 학회 위주로 평가가 이뤄지면서 이런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논문을 해외저널에 발표하면 2백% 인정하고, 국내저널에 내면 1백%만 인정합니다. 우리만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너무 보편적인 기준만을 들이대는 태도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순일: 지금의 연봉제는 정상적인 연봉제가 아닙니다. 연봉제는 경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결국 비용절감책에 다름 아닙니다. 예를 들어 대학경영자가 인건비의 비중을 50% 이하로 줄이겠다고 정해놓고 나면 그 결정의 타당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그 경영방침에 맞춰 파이를 쪼개주는 것입니다. 목적과 저의가 다른데 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굉장히 탁월하다면 남들의 몫을 해치지 않으면서 훨씬 더 많은 급여를 받아야 할텐데 그게 분명히 아니라는 거죠.

박순성: 말씀하신 것처럼 정형화된 평가제도와 관료적인 행정 등이 얽혀서 교수사회 전체를 뒤흔들 뿐만 아니라 교수들의 직업적 안정성, 학문이나 연구의 안정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현재 상당수의 교수들이 재임용 탈락이나 계약 만료라는 형태로 학교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수들이 대학이라는 지식공동체를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은 있는지, 관료제적 경영방식을 타파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 얘기해 보았으면 합니다.

홍원식: 계약제 시행을 앞두고 거론되는 것이 교수노조문제입니다. 수많은 교수들이 재임용 탈락이란 형벌로 해고되고 있는 형편에 교수가 과연 노동자인가 하는 질문은 진부합니다. 무엇보다 교수노조가 본격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어렵다면 교수협의회가 먼저 임의단체적 성격에서 벗어나야 하겠지요. 주로 총장을 뽑는 역할에 치중해온 협소한 교수협의회에서 탈피해 각종 제도적인 문제까지 처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개별 대학의 수준으로는 산적한 제도적 문제를 풀기 어렵습니다.

성경륭: 좀 더 원론적으로 접근하면 이런 잘못된 구조를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정부의 대학정책에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부분이 정부가 길을 정해놓고 강제하는데 따른 것입니다. 최근에는 ‘이리 오면 들어주마’식의 유인책을 쓰고 있습니다. 대학의 생명은 자율과 다양성입니다. 빙하기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생명체에 ‘변이’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대학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화해나가기 위해서는 정부가 그것이 가능하도록 자율성과 다양성이 구현되는 조건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지, 돈으로 쥐고 흔들어서는 안 됩니다.

대학교수의 희망찾기

이순일: 저는 지금의 제도중에서는 교수협의회가 그나마 제일 낫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현재 교협이 임의단체로 규정돼 있기 때문에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교수노조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전임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교수란 것은 교육자이자 동시에 학자라는 특이한 성격규정 때문에 우려되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모든 시간과 노력을 공부와 연구에 투입해야 하는 학자의 신분과 노조 전임자의 신분이 상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의 보직자들이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원래 학자요, 교육자라는 자기신분을 망각하고 행정가로 행동하려들기 때문입니다. 교수노조의 경우도 노조 전임자가 생기면 비슷한 문제를 맞게 될 것이란 우려를 지우기 힘듭니다.

이홍균: 대학의 운영구조와 연관해서 보면 대학사회가 상당히 획일화돼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사회는 굉장히 분화되고 복잡화되는데 대학은 오히려 획일화, 관료화되고 있습니다. 지식정보사회를 지향하는 대학이 획일화 돼서는 안되겠지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수협의회든, 교수평의회든 제도화된 구조와 더불어 각 개인 대학 교수의 목소리가 공론화될 수 있는 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순성: 대학의 행정이나 운영에 대한 공론의 장이 만들어지고, 어떤 식으로든 교수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만 대학의 민주적 운영이 가능하다는 지적인 것 같습니다. 토론을 진행하면서, 물론 개인의 경험이 작용한 것입니다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교수의 절반 이상이 유학을 갖다온 후 대학에 자리를 잡은 이들입니다. 짧게는 4~5년, 길게는 10년 정도까지 학문적 차원에서나 의식의 차원에서 가장 예민한 시기에 외국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한국사회로 돌아와서 재사회화의 과정을 겪고 있는 분들이 교수인지도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대다수의 교수들이 우리사회의 가장 비합리적인 부분에는 쉽게 적응하면서도 외국에서 배운 합리적인 부분은 되살리지 못하고 포기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수들이 자기자신의 재사회화에 성공하고 있는지, 오히려 실패했기 때문에 대학사회를 점점 나쁜 쪽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됩니다. 끝으로,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대학교수들은 과연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대학교수는 과연 누구인지, 개인적 관점에서 말씀해 주십시오.


홍원식: 저는 지금 지성인으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교육자나 연구자로서의 정체성 확보에 있어서도 몹시 혼란스럽습니다. 제 전공이 철학이라서 그런지 과연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지금과 같은 대학 현실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의구심이 듭니다. 오늘과 같은 유니버시티의 체제 아래에서는 철학은 압살되고 말 것입니다. 살 길을 찾아야죠, 어떻게든. 그래서 저는 요즘 가끔 대학 밖으로 눈을 돌립니다. 오히려 그곳에 철학에 대한 수요가 있는 것 같아서죠. 범사회적인 인식이 바뀌지 않고서는 대학 내 인문학의 싹은 머지 않은 시간 안에 마르고 말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철학 후속 세대는 끊어질 것이고.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정말 답답합니다.

성경륭: 교육부의 대학에 대한 평가, 그리고 대학의 교수에 대한 평가가 강화되면서 계약제와 연봉제도 광범위하게 도입되고 있는 중입니다. 일찍이 우리 대학들이 이처럼 급격한 변화를 한꺼번에 겪은 적은 없습니다. 따라서 교수들은 많은 혼란과 불안, 좌절감과 소외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교수들에게 “당신 행복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정말 그렇다’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자괴감도 느낍니다. 그러나 환경과 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교수로서 응당 해야 할 연구와 교육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대 상황이 빠르게 변화하면 할수록 본연의 임무에 더욱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교수의 존재이유이고, 그러할 때 국가와 사회는 교수들의 노력에 충심으로 경의를 표할 것으로 믿습니다.

이홍균: 학문을 매개로 하여 강의실에서 학생들과의 만나는 것 자체가 즐거움입니다. 제가 학생 시절에 고민했던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현재 학생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을 같이 생각하는 현장이 즐겁습니다. 그리고 연구의 측면에서는 제가 읽고 있는 책들이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를 확장시켜 줄 때의 기쁨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연구하고 있는 만큼 강의실이 생생하다고 느낄 때의 기쁨 역시 큼 기쁨입니다.

이순일: 어렵고 힘든 시기라고 하지만 지금 겪는 혼란들은 대학의 발전이라는 큰 궤도에 있어서는 요동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름길이 가장 돌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기에 조급한 마음 없이 연구실, 실험실, 강의실을 지키려합니다. 아직도 밤을 밝혀 실험실을 지키는 대학원생들과 시류에 묻어가기보다는 올곧게 공부를 해보겠다는 학생들이 남아있기에 대학에 몸담고 있는 것이 즐겁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얻은 경험의 한 자락을 나누어주는 것이 학생들에게 혹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 또한 개인적으로는 큰 기쁨아니겠습니까.
정리:안길찬 기자 chan1218@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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