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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통한 번역, 왜곡 키웠다
일본 통한 번역, 왜곡 키웠다
  • 김재홍 가톨릭대
  • 승인 2004.06.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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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참관기 : ‘철학원전 번역을 통해 본 우리의 근현대’

김재홍 / 가톨릭대·서양철학

번역 작업이 '철학함'일 수 있을까. 정녕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일까.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상과 사유형식이 만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서로 다른 문화 코드가 일치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일까. 그것도 서로 다른 ‘언어’적 구조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번역이 선행하는 문화로부터 이어지는 문화에로의 사유 코드의 변형과 사상의 수용이라고 한다면, 도리 없이 번역은 중요한 학문적 작업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 점은 중세철학이 서양고대철학, 혹은 헬라스 철학에 대한 아라비아 학자들의 연구 작업에 대한 수용과 지적 충격으로부터 이뤄진 번역과 주석 작업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을 상기하면 아주 명백하다.

우리의 경우도 예외 없이 번역과 주석 작업이 서양 철학 수용사의 출발이었다. 출발은 미미했지만, 이제 서양 철학적 문제의식의 도움 없이도 독자적 철학함의 단계에 접어들어 상당한 정도의 학문적 축적을 쌓기 시작했다. 이런 정도의 단계에까지 접어드는 과정에서 그간 이뤄진 번역작업을 통한 서양 사상과 철학의 수용사를 검토해 보는 일은 앞으로 ‘철학하는’ 세대를 위한 자료를 축적한다는 의미에서도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진다.

지난 토요일(2004년 5월 29일) 한국학술진흥재단 후원 하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주최로 '철학 원전 번역을 통해 본 우리의 근현대'라는 큰 제목으로 '번역된 철학, 왜곡된 근대'라는 논제 아래 1953년도 이래로 서양고중세 철학으로부터, 동양고전의 번역, 성경번역, 스페인, 독일, 프랑스, 중국의 근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원전의 번역 실태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가 있었다. 발표된 논문만도 무려 15편에 이른다.

지난해에는 해방 이전의 번역사의 수용 문제를 다뤘고, 이번의 발표는 그 후속 작업으로 5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번역의 현황을 면밀하게 톺아보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 작업을 통해서 발표자들은 번역의 구체적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한국 철학사에서의 원전 번역을 통한 철학의 수용 과정이 일본을 통한 '식민지 근대성'이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과연 '근대성'이란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좀더 정확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각 연구자들은 논문을 통해 번역에 관련된 여러 가지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몇가지 중요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상 독자에 따른 번역작업이 전문적 번역과 대중적 번역이 있을 수 있는데, 일차적으로는 원전에 근거한 전문적 번역이 나오고 점차적으로 대중적 번역의 필요성도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둘째로 번역과 우리말로 철학하기에 관련된 사항이다. 철학 용어들의 지나친 추상화가 일상적 생활언어와 유리되면서 철학이 우리의 삶과 유리돼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점도 지적됐다. 나아가 번역자간의 의사소통의 단절, 번역본의 상호 참조와 교류가 활성화되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됐다.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을 통한 번역작업이 이뤄졌지만, 이제 더 이상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에 매달리지 말고 일본문화에 대한 굴레를 벗어나야 할 필요성도 적극적으로 개진됐다. 일본 문헌에 대한 참고를 비밀로 해서는 학문적 성숙도가 이뤄질 수 없음도 지적됐다. 이것은 학자로서의 지적인 양심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연구 책임자인 김재현 교수(경남대 철학과)는 제대로 된 번역 텍스트의 생산과 연관해서 국가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게 요청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학문 공동체의 논쟁을 담아낼 수 있는 콘텍스트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텍스트가 많아져야 하고,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가 정책적 지원이 무엇보다 요청된다는 것이다.

결국 번역 작업에 관련된 여러 문제점을 짚어내는 작업을 통한 한국 철학 자체에 대한 반성 작업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통한 서구의 번역이 가져온 왜곡된 사유구조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를 극복하는 과제도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됐다. 번역 과정을 무시하고는 우리의 근대와 현대의 자화상을 잡아낼 수 없다.

우리의 전통과 서구 문화의 만남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언어 번역의 문제만 아니라, 번역과 관련된 제도적 문제와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번역의 문제를 번역자라는 개인적 차원만이 아니라, 번역을 둘러싼 사회 상황과 학술제도 등의 국가 정책적 차원에서도 검토돼야 할 중요한 학술 작업임을 이번 연구 성과물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은 중요한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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