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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조 교수와 카르납
이한조 교수와 카르납
  • 박찬수 동덕여대
  • 승인 2004.06.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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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


박찬수 교수 (동덕여대, 교양학부)

웹 상에서 콘텐츠 검색이 일반화 되면서, 인문학 교양과목 가르치기가 무척 어렵게 됐다. 영화, 비디오 등 동영상이 문자 텍스트를 대신하고, 실시간 인터렉티브하게 빠르고 재미있게 진행되는 영상 텍스트에 길들여진 학생들이, 무척 느리고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하는 주제들과 언어-문자로 말해지는 담론을 멀리하고 있다.

  
필자의 경우 ‘영국경험론’, ‘과학철학’, ‘기호논리학’ 등의 전공과목에서는 교재나 논문을 요약해서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읽어나가든지, 또는 칠판에 계속 판서를 하면서 설명하는 교수법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철학개론’, ‘논리와 사고’, ‘서양사상의 이해’ 등의 교양과목에서는 이러한 교수법을 적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될 수 있는 대로 학생을 보면서 판서는 중요한 것만 하는 방식을 택하게 됐다. 그 이유는 폐강 등 수강학생의 감소를 염두에 두고 재미있는 사례와 영화, 비디오에서 따온 이야기 등으로 주제를 설명해야 하는 시대적 상황 때문이다.

이 교수법도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 예전 같지 않은 열정에다가, 인문학의 강의가 말초신경까진 아니더라도 즉물적 감성의 한계를 넘나드는 동영상 텍스트를 따라가려고 해서, 강의 형식(방식)이 인문학적 내용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인문학 강의의 모토는 ‘실용적이고 쉽고도 쉽게 그리고 무척 재미있게’라고 한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묵은 술은 묵은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물론 묵은 술을 새 부대에 담아내는 작업, 즉 새로운 해석방법, 새로운 문법이나 의미론으로 묵은 술을 담아내는 작업은 추구돼야 하나, 그 묵은 부대에 담긴 그 당대의 해석법을 알지 못한 다음에야 새로움이 무슨 새로움이겠는가.

‘강의법’하면, 1980년대 말 정년퇴임하신 이한조 선생님(서강대 철학과)이 생각난다. 선생님은 강의실에 들어오시고 나가실 때나, 학생들은 웃지도 않는 유머를 짧게 하시며 비스듬히 교탁에 한 손을 대고 혼자 웃으실 때나 학생들을 향해 얼굴을 보이실 뿐, 언제나 칠판만 바라보시고 계속 판서하고 지우며 강의하셨다.

 

우리들은 선생님의 등과 칠판만 보고 많이 배웠다. 필자도 몇 번 선생님을 따라 제법 공부가 된 과목에 대해 시도해보았으나 아마 한 학기에 불과 몇 번 정도밖에 하지 못했고, 선생님의 공부와 기억력을 따라가긴 역부족이었다.

시카고 대학과 UCLA 대학의 철학과 교수였던 독일 출신의 루돌프 카르납이, 학생 시절 독일 예나 대학에서 고틀로브 프레게(1848-1925, 수학과)에게 배울 때를 기술한 대목과 일치한다.

 

"1910년대 초 '매우 적은 수의 학생들', 어떤 때는 '세 사람만 대상으로', 우리는 그의 등만 보았고, 그는 칠판에다 그의 기이한 논리기호법의 다이어그램을 그리고 설명하고, 우리는 강의중이나 후에도 어떤 말도 질문도 하지 못했다.”

 

이한조 선생님은 공식적으로 발표한 논문이 전무하나 우리나라에 영미철학의 씨를 뿌리셨고, 카르납은 1920년 초에 프레게의 저작을 다시 읽고 습득해서 미국철학의 초석을 정초했다.       

공학, 자연과학, 사회과학과는 다르게, 발표나 토론식 수업을 제외하곤 인문과학에 무언가 뾰족한 교수법이 있을까. 필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에게 눈 앞에 보이는 떡을 먹여주어야만 하는 것인가.

 

어떤 주제를 다루는 체계적인 태도, 철저한 분석적 방법과 종합, 끊임없이 제기되는 자기반론 속에서 해결책 모색하는 과정만이 학생들을 훈련시키며, 선생님들의 말씀 중 행간에서 파악되는 느낌과 직관만이 새로운 상상력과 적응력으로 다가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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