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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로 산다는 것
미아로 산다는 것
  • 교수신문
  • 승인 2021.01.1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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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사 | 252쪽

 

저자는 한국을 “급(級)의 사회”로 규정한다. 어느 사회든 서열이 있지만, “대한민국의 서열은 그냥 수직적인 직선”이고 “노르웨이에 서열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서열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상대가 사는 거주지의 크기, 학벌, 직업을 기준으로 관계의 친소(親疏)와 존대의 정도를 결정한다. 우리 사회의 급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죽음에도 등급이 있다. 가난한 노인, 외국인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은 이름 없는 단신 보도로 세상에 알려진다. 2007년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외국인 보호소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사무소 직원들은 외국인 노동자가 도주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잠긴 문을 열지 않았다. 그 결과 외국인 노동자 열 명이 화재로 사망했고, 한국 정부는 어떤 사과나 약속도 없이 1인당 1억 원을 유가족에게 보상하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2018년 한국 노동연구원이 20~50대 직장인 2,500명을 조사한 결과 66.5퍼센트가 지난 5년 동안 직장 내에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대답했다. 직장 생활 중에 폭언을 한두 번 이상 들은 사람은 열 명 중 아홉 명이고, 폭력을 경험한 사람도 12~17퍼센트에 달했다.

 

새로운 가난, 관계 맺기 불능, 사색의 증발, 타자 혐오…

불안과 가난, 고독의 무게를 감당하며

미아 아닌 미아로 떠도는 시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1장에서 저자는 자신의 자리를 되돌아본다.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났고, 한국에 귀화해 한국인이 되었지만, 노르웨이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저자는 자신이 왜 탈로(脫露, 탈러시아)와 탈남(脫南)을 선택했는지 돌아보며, 자신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담담히 서술한다. 더 이상 “갑질이 일상화된 한국 대학의 세계”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고, “교수님들이 벌이는 추태들”과 “조교들이 그들의 커피 심부름을 하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데 해방감을 느끼지만, 모어로 말하고 쓰지 못하는 삶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2장에서는 우리 사회의 가장 내밀한 곳, 즉 가족 질서의 실상을 이야기한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은 “산업화된 국가 가운데 가장 반여성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나라, 여성의 평균 임금이 남성의 63퍼센트에 불과하고 여성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이 되어버린” 사회이다. 저자는 한국의 “성난 남성들”에게 왜 “강자에게 얻어맞고 약자를 때리는지” 묻는다.

3장에서 저자는 우리 사회를 “급의 사회”로 규정하며 모든 사회 구성원의 존엄할 권리를 절실하게 요구한다. 우리 사회에서 소득 상위 1퍼센트는 가구당 평균 6.5채의 주택을 소유하고 상위 10퍼센트는 전체 부동산의 절반을 소유하지만, 47퍼센트는 집 없이 월세와 전세를 전전한다. 한 사람이 국내총생산 19퍼센트를 차지하는 대형 기업을 세습하고, 교회의 담임목사 자리를 세습하고, 부동산을 세습한다.

4장에서는 역사적인 차원에서 한국 사회가 겪은 상처를 톺아본다. 저자는 “과거 청산은 예방 접종”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과거 청산을 요구해야 하는 이유는 개인이나 집단의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현재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원이 점점 커지듯이 ‘나’의 자리에서 시작된 사유가 5장에서 지구적 차원에 이른다. 인간 본성에 내재된 질투의 감정을 신자유주의와 연결하고, 전쟁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휘발유와 자동차에 비유한다. 저자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를 겪는 모든 사회가 ‘진실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가 주목하는 것은 불평등과 격차이다. 모든 나라에서 공공 부문 종사자, 대기업 직접 피고용자들은 코로나19로 큰 불이익을 보지 않은 반면, 서비스 부문과 유통 부문의 영세 기업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러시아 속담에 “Кому война, кому мать родна”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전쟁이지만 또 누구에게는 어머니 같다는 말입니다. 즉 전쟁은 누구에게는 그야말로 참사일 뿐이지만, 누구에게는 자비로운 어머니처럼 필요하고 바람직한 현상이라는 이야기죠. 자본주의적 성장은 늘 전장에서의 살상을 포함한 각종 참극을 기반으로 합니다.”(239쪽)

변화는 안으로부터 온다. 저자는 이 디스토피아 같은 세계에서 혁명은 결국 나와 우리를 회복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라고 말한다. 스스로에게 ‘나의 생각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우리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혁명적인 발상이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돌아갈 수 있는 집을 “공감과 연대, 협력”을 통해서 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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