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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 대한 예의와 문화수준
작가에 대한 예의와 문화수준
  • 심영의
  • 승인 2021.01.19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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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의의 문학프리즘]

자신의 책을 내 본 사람은 이해하겠지만 누구라도 스스로의 부족함에 얼마간 부끄러우면서도 가능하면 많은 독자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책에 대한 빚을 갚거나 인사를 해야만 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어서 등기우편요금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여러 군데에 책을 보낸다. 책을 잘 받았다는 의례적인 말 한마디 없는 이들도 더러 있으나 잘 읽고 짧게라도 소감을 SNS 등에 올려주면 더 없이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럴 경우 그 사람의 책을 주문해서 읽어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출판된 지 오래돼서 중고서적으로 구입하는 경우 책 표지 안쪽에 작가의 서명이 담겨 있는 채로 오는 경우도 있다. 참으로 씁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언젠가 지인이 오래된 필자의 책을 한권 구입해서 서명을 해달라고 가져왔는데 그 책엔 필자가 서명해서 누군가에게 건네주었던 속지가 그대로 있었다. 참담했다. 작가가 아무에게나 자신의 책을 서명해서 보내는 경우는 없다. 자신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 지라도 작가에게는 그렇지 않다.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호명해서 보내준 책을 몇 푼 받고 중고사이트에 팔아넘기는 그 알량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기호 단편소설  『최미진은 어디로』에는 그런 세태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최미진은 어디로』에서 소설의 화자 ‘나’는 소설가이고, 그것도 대놓고 작가 자신의 이름 ‘이기호’를 드러내고 있다. 소설의 내용은 아주 단순하지만 함의는 간단치 않다. 중고나라 사이트에서 우연하게, 누군가에게 서명해서 건네주었던 자신의 소설을 파는데, 그것도 다른 책들을 사면 덤으로 준다는 것을 발견한 화자가 모욕감을 느낀다. 그래서 소설의 화자는 중고 사이트의 판매자에게 연락을 하고 그를 만나러 서울까지 간다. 책을 회수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서명해서 건네주었던 인물 최미진이 대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대통령 아들의 문화예술지원금 수령과 관련한 일부의 도를 넘은 비난 가운데 10년 전 지병과 빈곤을 견디다 못해 숨을 거둔 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가 소환되고 있다.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조심스러우나 고 최고은 작가는 갑상선 기능 항진증과 췌장염을 앓았지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32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것으로 알고 있다. 2011년 2월 사망한 최고은 작가를 처음 발견한 이웃 주민은 집 현관에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었다.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집 문을 두드려 달라”는 내용이 적힌 쪽지를 보고 음식을 싸왔다가 그가 숨진 것을 발견했다고 전해서 많은 이를 안타깝게 했던 기억이 상기도 새롭다.

아티스트이면서 대학 강사인 대통령의 아들이 예술가들에게 주는 지원금 1천 4백만 원을 수령하고 전시회를 연 것을 문제 삼는 이들이 고 최고은 작가를 소환한 까닭은, 대통령 아들이어서 특혜를 받았으리라는 근거 박약한 추측과 지원금을 신청했으나 지원 받지 못한 수많은 지원자들과 비교할 때 대통령 아들의 염치없음을 꾸짖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대통령 아들이어서 특혜를 받아서는 안 되지만 그것 때문에 부당하게 차별을 받는 것도 올바른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필자도 그런 종류의 문화예술지원금을 받아 책을 냈고, 나중에는 심사위원으로도 참여했는데, 지원예산은 턱없이 부족하고 지원신청을 요청하는 작가들은 너무 많아서 수혜를 입는 사람보다 탈락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심사를 할 때도 최소 4~5명의 심사위원들이 작가적 양심에 따라 지원자가 제출한 포토폴리오와 작품의 우수성 등의 여러 요소를 따져 공정하게 심사한다. 그것을 부당하게 폄훼해서는 안 된다.

문화예술에 종사하는 작가들의 생존의 문제는 어느 시대나 만만치 않았다. 극히 일부는 여유 있는 창작활동을 하고 있겠으나 대다수의 작가들은 생존에 급급한 현실적 조건과 싸우면서도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결국 앞에서 말했던 두 가지 문제, 서명해서 건네주었던 책을 중고사이트에 팔아넘기는 이들과 작가들의 창작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쟁의 도구로만 활용하는 데 에는 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지 못한 탓에 발생한 일이라고 본다. 그것이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현재 수준일 수도 있다.

심영의(문학박사. 소설가 겸 평론가)
심영의(문학박사. 소설가 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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