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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동향 : 저자들이 본 오늘의 학술출판
출판동향 : 저자들이 본 오늘의 학술출판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6.07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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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 갖춘 편집자와 소통하고 싶다

▲ © 일러스트 김차준
저자와 출판사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이건 자명하지만 저자와 출판사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서는 의외로 공론화가 거의 없다. 학술출판일 경우 양측은 훨씬 밀도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하지만, 각박한 출판현실은 여러 가지로 이를 어렵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기초학문을 하는 지명도 없는 신진학자들이 엄청난 자비를 들여서 책을 내는 풍경을 보면 그 열악한 현실에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다.

그럴수록 저자와 출판사의 관계는 끊임없이 공론장으로 호출될 필요가 있다. 우리시대 저자들은 출판사들에게 어떤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먼저 '絶版의 거대한 연쇄'를 주목해야 한다. 요즘 많은 중소형 학술출판사들이 '초판 6백부 시대'를 열고 있다. 고가정책을 써서 사볼 사람만 보게 하고 책의 생명을 끝내 버리는 것이다. 사회과학 서적에서 이름 있는 H 출판사는 제작단가가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 책인데 3만원 육박하는 가격을 붙여 시중에 내놓고 있다.

저자로서는 당연히 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책이 너무 비싸면 독자들에게 미안하고, 지식을 널리 퍼뜨리려는 지식인의 본심에 위반된다. 문제는 5백권이 1년 정도 후 다 팔리고 나면 그 후의 독자들은 책을 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저자에게 "혹시 보관용이 없냐"고 전화를 해도 무소용이다. 노성두 이화여대 강사는 지난 1997년부터 41권의 저·역서를 냈는데, 현재 10권이 살아있다. 그는 사계절출판사를 아주 높이 평가한다. 그의 저서 '알베르티의 회화론'이란 어려운 미술이론 교재를 7년째 절판시키지 않고 꾸준하게 인쇄하기 때문이다. 노 씨에 따르면 출판사로서는 "책 담당자 왔다갔다하는 경비도 안나오는" 수입이지만, 출판사 측은 개의치 않아 감동적이라는 것.

그많던 학술서들은 어디로 갔을까

열악한 대학출판부나 사장 혼자 편집하고 영업하는 '1인출판사'와 거래하는 저자들은 '독립군'처럼 뛴다. 출판사에 '전문 교열인력'이 없어 저자가 원고를 완벽하게 써야하는 부담이 따른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저자들은 원고를 초고 상태로 만들고 나면 지친다. 더 이상 원고를 쳐다보기 싫을 때도 있다. 이걸 극복하고 저자가 직접 교정을 보더라도 '자기 원고'이기 때문에 잡아내지 못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출판사가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많아 책이 나오고 난 후에 사소한 오타부터 시작해 한 문단이 빠져버리는 크고 작은 사고들이 발생한다.

이것은 첫째, 영어 이외의 외국어와 기본적인 학술담론에 익숙한 편집진이 부족한 데서 발생한다. 둘째, 교정을 외부용역으로 넘기는 현재의 '외주시스템'이 많은 오타를 생산하고 있다. 미학이론가 강성원 씨는 "출판사에서는 문장이 어렵다고 쉽게 써달라 하는데, 문제는 출판사들이 '어렵지만 말이 되는 글'과 '어렵고 말도 안되는 글'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 있다"라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시쳇말로 '고친다고 했는데 더 악화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강 씨의 말을 토대로 국내 주요 학술출판의 교정실력을 평가하자면 한글맞춤법 같은 '형식교정'은 제법 꼼꼼한 편인데, '내용교정'은 부족한 듯 보여진다.

옛날에는 많은 저자들이 자기 문장을 손도 못 대게 하는 경우가 많았고 요즘도 그런 학자들이 있지만, 경력 있고 전문성과 성실성을 갖춘 편집자와 일을 같이 해본 학자들은 출판사에서 꼼꼼히 원고를 이해한 뒤에 수정요구하면 즐겁게 받아들인다. 특히 번역서일 경우 '문장'이란 게 고치면 고칠수록 좋아진다는 법칙을 경험적으로 깨달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쪽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출판사는 민음사, 그린비출판사, 푸른역사, 책세상, 이제이북스 등이다. 철학전문 신생출판사인 이제이북스는 상당수 번역자와 문장과 개념의 '정확성'을 둔 '멱살잡이'로 '명성'을 얻고 있지만, 이를 갖고 타박하는 사람은 드물다. 네그리, 라이히, 가타리 등의 번역서를 내온 윤수종 전남대 교수는 "저자와 출판사간 교정본을 세차례 주고받으면 알맞은 것 같다"라고 경험담을 말한다. 그 정도는 해야 책이 깔끔해진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고집센 저자'들에게도 넌지시 충고하는데, "학술지에 싣는 것이 아니라면, 독자를 위해 문장에 대한 출판사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게 맞다"라고 말이다.

저자들이 대표적 불만의 또 하나는 '지각 출판'이다. 원고를 넘긴지 3년이 넘어도 "밀린 일정이 많아서 출판이 안 되는" 경우는 이만저만한 지각이 아니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는 "머레이 북친 책을 출판사에 넘겼는데 몇 년이 있어도 출판이 안됐다. 다른 출판사로 옮기려 해도 저작권 문제 때문에 꼼짝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나키즘 관련 책도 몇 년을 묵히길래 집어치우라고 했다"라고 털어놓는다. 독자입장에서도 따끈따끈한 해외 학술 동향을 철 지나 읽게 되는 격이라 분명 문제가 있다.

출판사들의 상업성도 학자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 박홍규 교수는 자신이 평전 저술가로 명성을 얻자 여기저기서 유명한 사람, 이를테면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씨 평전을 써달라는 요구들을 씁쓸하게 거절하고 있다. 문제는 대형출판사들이 '돈 되는 책'에만 눈길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책에 없어서는 안될 부분을 너무 전문적이라고 빼자고 압력을 넣는다든지, 책의 제목과 표지를 너무 대중적으로 가져간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박상진 부산외대 교수(이탈리아문학)는 "이론적인 출사표를 던진다는 기분으로 묵직한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는데, 표지를 너무 대중서로 만들어서 항의했다"라고 밝힌다. 이에 대해 출판사는 "속 알맹이나 썼으면 됐지 겉까지 참견하느냐"는 답변을 해왔다. 저자와 출판사간 밀고당기기 풍경이다.

저자들은 또한 대형 출판사들이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공장 같다는 문제제기도 하고 있다. 큰 출판사라면 그 규모에 맞게 전문편집진용을 갖추고 일을 그럴싸하게 해야하는데, 관료집단처럼 의사소통과정도 느리고 답답하다는 지적이다. 저자와의 관계도 출판사의 주어진 틀 내에서 통보식으로 이뤄져 종종 "기분 나쁠 정도로 건방지다"라는 불만도 산다. 학술출판이 어렵다보니, 학술서를 내주는 출판사들은 이문을 적게 남기는 대신 저자에게 '유세'하는 일종의 암묵적 권위관계가 양자간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소형출판사에 오면 상황은 더욱 악화돼서 나타난다. 큰 출판사는 그래도 브랜드 이미지도 있고 해서 책을 꼼꼼하게 만드는데, 소형은 책의 종수를 늘려서 시장에 깔아놓는 데 급급하기 때문에 편집체제가 깔끔하지 못하고, 오타도 많다는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제작비의 일부분을 저자에게 부담하게 하는 '악풍'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새내기 강사 저자들은 IMF 이전만 해도 70만원 정도의 자기 책을 사주면 출판을 해줬는데, 요즘은 2∼3백만원어치 책을 구입해주는 조건으로 계약하는 등 갈수록 상황이 안 좋다. 중앙대 교수는 "교수가 되기 위해 책을 내고 집에다 2-3백부 쌓아놓은 후배강사들이 수두룩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세지급의 불투명성은 많이 줄었다. 그럼에도 학술출판은 갈수록 박해지고 있다. 가령 5백부의 책을 초판으로 찍어서 1백부가 팔리면, 그 1백부에 대해서만 인세를 지급하는 경우가 그렇다. 웬만한 양식있는 출판사라면 초판부수에 대해서는 발행후 곧바로 인세를 지급하는 게 불문율인데 말이다. 저자 입장에서는 '출판사가 겨우겨우 연명하는 걸' 보면서 인세를 올려달라고 말하기도 껄끄러워 아쉬운 소리를 하기보다 출판사를 옮겨다니기 일쑤다.

출판사 찾아 배회하는 저자들의 운명

송병선 울산대 교수(스페인문학)는 보르헤스, 마르케스를 비롯한 스페인어권 소설을 꾸준히 번역해온 대표적 번역가다. 그가 출판사에 바라는 것은 '긴 안목'이다. 남미쪽 소설을 내고 싶다고 찾아오는 출판사들이 "단발성으로 내려는지, 아니면 장기기획을 하려는지를 판단하고 출판사를 결정한다"라고 그는 말한다. 김욱동 서강대 교수(영문학)는 '전문성'을 본다. 얼마 전 그의 환경문학서를 환경전문출판사인 '나무심는사람'과 작업을 같이 했는데 문학전문 출판사보다 편집자의 원고 해독력이 더 뛰어났다고 전한다.

저자들은 한 출판사와 자신의 '주치의'처럼 꾸준히 계약하는 걸 한번쯤은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상황에서 이는 쉽지가 않다. 꾸준히 사세를 유지하는 출판사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고, 한 출판사에서 계속 내면 주위에서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색안경을 끼기도 한다고 말한다. 아무튼 자신에 맞는, 자신의 책을 '내줄' 출판사를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게 오늘날 저자들의 운명이다.

박준식 한림대 교수(사회학)는 '사회과학 학술출판사'에 대해 '체계적인 마케팅 능력의 부재'와 ' 원고의 평가, 교열, 편집, 디자인 등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역량 있는 에디터의 부재'를 대표적 문제로 꼽는다. 박 교수는 이것이 기본적으로 출판산업의 열악성에 그 원인이 있다며 "공공 도서관, 학술 업적 평가 시스템에 따른 공공 구매 제도 등이 발전"해야 하고, 그래야 출판사들이 단기적 업적 및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책을 평가, 출판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김진 울산대 교수 또한 "학술업적 사후평가제를 도입해 학진의 논문지원을 줄이고, 저술지원을 대폭 늘려서 고만고만한 논문들의 대량양산을 줄이는 대신, 양질의 연구저술에 충분한 자금을 지원하는 게 한국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도움이 된다"라는 견해를 보였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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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6-09 00:25:54
시의적절하고 명쾌한 지적이군요. 좋은 기사에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