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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사회를 위한 학술아젠다6 - 기초학문 확립
21세기 한국사회를 위한 학술아젠다6 - 기초학문 확립
  • 하병학 가톨릭대
  • 승인 2004.06.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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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성’보다는 ‘교양’ 먼저…소통능력 키우자

우리의 근대문명은 날림공사인 측면이 있다. 기초학문의 튼튼한 기반 위에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문학과 이공계 학문의 위기현상은 기초학문의 부실에서 오는 누수현상이 아닐까. 기초학문의 중요성에 대해선 다들 공감하지만, 학계가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 무엇을 토론하고 논의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아래의 두 글은 이 땅의 인문학과 자연과학 및 공학이 튼튼해지기 위해서는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기초학문의 확고한 성립은 무엇보다 그것을 담지해나갈 튼튼한 인재양성에 있다는 주장이다.

하병학 / 가톨릭대 철학

오래 전부터 감지된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는 냉담하지만 공학의 위기에 대해서는 너나 할 것 없이 각종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여기에서 인문학을 다시 강조하는 것은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 아니다. 인문학의 부재는 우리 사회에서 여러 근본적인 문제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서는 날쌘 감각이 번득이지만 그 문제와 관련된 전반에 대한 통합적인 사유능력은 떨어지고,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도 읽을 가치가 있는 고전은 어렵다고 멀리 하면서도 영화, 광고, 컴퓨터 게임에 대해서는 상당한 식견을 보이는 것이 오늘날의 대학생이다. 대학교에서 과제를 할 때 우선 인터넷에서 각종 정보를 찾는다면서 창의적인 생각을 하기는커녕 표절과 짜깁기가 객관적인 정보라는 이름 아래 난무하고 있다. 영어 못하는 대학생은 무능력자로 취급하면서도 한글로 된 한 장의 보고서에 한글 맞춤법에 어긋난 것이 수 십 개가 된다.


이러한 인문학적인 기초 소양의 부족은 곧바로 우리사회의 적나라한 문제를 양산한다. 대통령 탄핵, 이라크 파병, 양심적 병역거부 등의 문제는 계층간의 갈등을 넘어 서로 적대성까지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의견을 설득력 있게 표현할 능력은 없으면서도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조롱하고 적이라 간주하는 편협성이 문제다. 우리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집단들간의 갈등이 아니라 이러한 갈등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는 데 있다.
인문학의 위기가 낳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우선적으로 책임질 사람은 바로 인문학자들이다. 인문학자로서 우리는 인문학의 위기를 물질자본주의의 확대와 경제성을 가진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사회에만 탓을 돌리지 않았나. 혹 인문학도 다른 과학처럼 전문과학을 지향하지는 않았나.

인문과학도 전문과학을 지향해야 하나

최근 우리 학계에는 인문학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시도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몇몇 대학에서의 학제적 기초인문교양과목 개설이다. 동덕여대, 숙명여대, 세종대, 가톨릭대 등에서는 현재 ‘발표와 토론’, ‘읽기와 쓰기’, ‘분석과 비판의 기초’, ‘문제해결과 의사소통’, ‘논술’ 등의 이름으로 학제적 기초필수교과목들을 운영하고 있고, 부산대, 성균관대 등에서도 추진 중이다. 이 교과목들의 학제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과목들을 담당하는 부서는 어느 개별학과가 아니라 교양학부, 전담센터다. 둘째 상이한 전공 출신의 여러 전담교수들이 동일한 교과목을 연구하고 교육한다. 셋째 소수의 제한된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실질적인 토론수업을 하면서 대학신입생들의 학문탐구능력을 배양하고 있다. 넷째 다양한 분야의 고전들을 필독도서, 추천도서로 설정하고 고전읽기의 즐거움을 고취시킨다.


이러한 기초필수 교양교과목들의 목표는 무엇인가. 겉으로 보면 이 교과목들은 주로 글쓰기와 읽기 그리고 말하기를 교육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부 대학에서는 이 교과목을 여전히 국어국문학자가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도 들리고, 심지어 공과생들, 법대생들에게는 공대교수, 법대교수들이 맡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 마디로 언어만을 주목한 결과이거나 글을 기능 위주로만 보고 인문학자들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제적 기초인문교양과목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 돼야 하나. 슈바니츠는 ‘교양’(들녘 刊)에서 교양을 생동감 있게 획득하기 위해 우선 “교양지식을 에워싸고 있는 거룩한 붉은 광택, 위압감을 주는 효과, 개념의 안개를 모두 걷어내야 한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다시 말해 흡사 우상숭배와 같은 인물에 대한 중압감이나 현학적인 개념의 장벽을 걷어내어 삶과 친숙하고 성숙한 인간관계를 위한 교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교양으로 이끄는 황금길은 바로 언어의 길을 통해 나 있다”라며 “교양은 인간의 상호 이해를 즐겁게 해주는 의사소통의 양식”이라고 주장한다.


의사소통은 무엇인가. 단순히 글과 말에 대한 능력인가. 인문학이 개별학과로 파편화된 현실에 대해 크로스화이트가 ‘글쓰기’를 예를 들어 던지는 비판은 새겨들을 만하다. “학부 커리큘럼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특정 학문 분야의 글쓰기 관습을 가르치는 강좌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글쓰기를 통하여 의사소통하는 학생들의 일반적인 능력을, 즉 추론하는 능력을, 매우 다양한 전문적인 자료에서 인용하는 능력, 다양한 청중에 적응하는 능력, 삶에서 대면하게 되는 모든 다양하고 급속도로 변화하는 의사소통 상황을 이해하고 여기에 합리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즉 의사소통이란 어떤 책, 어떤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분석·비판하고, 창조적으로 사고하며, 궁극적으로 우리 삶과 연관지어 통합적으로 이해해 다른 사람들과 합리적이고도 설득력 있게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바로 이것이 학제적 기초인문교육, 교양교육의 목적이 돼야 한다.

기초학문·교양교육의 목적

이러한 의미의 의사소통은 언어, 사유, 내용, 자료 등을 분파적으로 탐구해 온 오늘날의 인문학이 왜 기초학문의 의미를 잃어버렸는지 다시금 반성케 한다. 인문학을 기초학문으로 복권하기 위해서는 학제적 영역이 다시 연구되고 교육돼야 한다. 이는 지식전달의 전공교육, 기초지식 전달의 교양교육이 아니라, 바로 전공에서 올바로 학문할 수 있는 학문탐구능력교육을 지향한다. 이러한 기초인문학 교육은 전공과 상관없이 학생들의 학문탐구능력과 의사소통능력에 관심이 있는 인문학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독문학을 전공해 한 권의 훌륭한 번역을 한 학자라면, 그리고 괴테 작품 자체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문학 일반에 대한, 궁극적으로 인문 일반에 대한 관심을 가진 학자라면 국어국문학, 철학 등을 하지 않았더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은 인문학에서는 심화된 전문성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인문학이 모든 학문에 기초가 된다면, 다시 말해 기초교양학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개별과학의 전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이라는 일반성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성은 결코 한 개별과학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학제적 연계와 공동작업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국제화와 함께 지방화도 요청되듯, 개별학문의 전문화와 함께 학제화도 요청되고 있음을 인문학자들이 주목해야 한다.

필자는 독일 에어랑엔대에서 '에드문트 후설에 있어서 과학철학으로서의 논리학에 대한 보편수학의 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자기기만의 현상학 ', '학제적 교양과목과 의사소통', '학제적 학문탐구를 위한 비판적 사고와 논증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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