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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린다는 것
사람을 살린다는 것
  • 교수신문
  • 승인 2021.01.1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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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드 비세르 지음 | 송연수 옮김 | 황소자리 | 356쪽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함께 건너는 환자와 의료진,

아슬아슬한 그 길 위에서 피어난 아주 특별한 이야기

의료진에게는 특수한 유형의 공감 능력이 요구된다. 환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되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심리적 장벽을 세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그들은 학생 시절부터 훈련받는다. 하지만 간혹 단단한 그 장벽을 뚫고 들어와 의료진의 마음과 정신에 결정적 흔적을 남기고, 끝내 인생관과 삶의 방향까지 돌려놓는 환자들이 있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이야기를 담은 희귀한 역작이다. 각 분야의 신출내기 전공의부터 간호사 응급구조사 요양보호사들까지, 스티브 잡스의 주치의로 유명한 종양외과 전문의 카스퍼 반 아이크부터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 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에 이르기까지, 80여 명 의료진이 털어놓은 ‘내 인생의 환자’에 얽힌 이야기는 때로 눈물겹고, 때로 섬뜩하고, 때로 먹먹한 울림을 전한다. 의료 현장에서 숱하게 만나고 헤어진 여러 환자 중 딱 한 명에 얽힌 기억, 그와 함께한 특별한 경험들을 생생하고 진솔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 책은 코로나 19로 인해 살얼음판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남다른 감동과 위로를 선사한다.

환자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지만,

그 의사를 진짜 의사로 키우는 건 환자들이다

2017년 2월의 어느 햇살 좋은 날, 시동생의 장례를 치르던 저널리스트 엘렌 드 비세르Ellen de Visser는 붐비는 장례식장에서 조문하던 한 종양학 전문의와 마주쳤다. 생전 시동생의 담당의였던 그 의사는 자신에게 많은 걸 가르쳐 준 환자이자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려 짬을 내 찾아왔다고 인사말을 전했다. 그 말이 네덜란드 일간지 〈Volkskrant〉의 과학담당 기자로 일하는 비세르의 호기심을 끌었다. 굳이 가르침을 주고받는다면, 환자가 의사에게 받는 게 일상적이지 않을까? 한데 그 반대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 의사 말고도 어떤 특정 환자와 얽힌 사연을 간직한 또 다른 의사들이 있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삶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거나 귀중한 교훈을 던져준 한 명의 환자에 관한 의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별다른 기삿거리 없는 여름 시즌을 메워줄 ‘충전용 시리즈’로, 처음에는 단 6개의 칼럼을 받을 예정이었다. 더구나 기꺼이 글을 기고할 여섯 명의 의사를 찾는 작업도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막상 몇몇 의사와 접촉해보니 상황은 전혀 딴판으로 흘러갔다. 그녀와 만난 의사들이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놀랄 만한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단기 시리즈로 기획한 코너는 매주 실리는 고정 칼럼으로 발전했다. 칼럼의 회차가 쌓여가면서 필진의 범위도 확대돼 간호사와 심리학자, 법의학자와 긴급구조사 등 전방위 의료진으로 넓혀졌다.

독자들의 반응도 폭발했다. 실수와 회한, 보람과 두려움을 진솔하게 털어놓는 의료진의 이야기에 감동했다는 편지와 전화, 이메일이 쌓였다. 한 시인은 어느 정신과 의사에게 시 한 편을 헌사했다. 한 노부인은 판단 실수를 고백한 전공의를 직접 찾아 격려했다. 어느 종양 전문의의 사연을 읽던 중년 남성은 아침 식탁에서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고 털어놓았다. 임상윤리학자인 에르빈 콤파니에가 20년 전 자신의 병원에서 사망한 젊은 여성 이르마에 관한 이야기(55쪽, ‘누구에게나 마지막 밤은 온다’)를 기고한 후 당시 환자의 남자친구였던 남성이 다시 한번 콤파니에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생을 얼마 안 남기고 호스피스 병동에 머물던 간암 말기 환자는 소화기내과 전문의 유스트 드렌스가 쓴 자신의 이야기(187쪽, ‘“여기 강가에서, 이제 나는 행복해.”’)를 읽은 후 “유스트, 내가 빈손으로 떠나지 않게 용기 내줘서 정말 고마워.”라고 울먹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후일담이 날아들었다.

세상 모든 의사의 가슴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2년 동안 수많은 독자를 울리고 가슴 쓸어내리게 했던 칼럼을 묶은 게 바로 이 책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특별한 책은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아시아 각국으로 판권이 팔렸고, 영미권으로 소개되는 과정에서 데임 샐리 데이비스(전 영국 최고의료 책임자), 카림 브로히(로열 런던병원 중증외상 전문의), 앤서니 파우치(미국 국립 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 소장) 같은 의료계 거장들이 흔쾌히 자신들의 경험담을 보태며 이야기에 힘을 실었다.

지금 우리는 미증유의 위기를 건너고 있다. 당연하다고 여기던 일상들이 뭉텅뭉텅 잘려나가는 상황에서 다시 또 의료진의 소명의식과 전문성이 이 사회를 어떻게 지탱하는지 절감하는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의료진과 일반인 모두 두고두고 숙고할 여러 생각과 치유의 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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