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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률직해
대명률직해
  • 교수신문
  • 승인 2021.01.1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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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 고사경 지음 | 조지만 옮김 | 아카넷 | 572쪽

언제부터 『대명률직해』라는 명칭을 사용했을까

『대명률직해』란 『대명률』이라는 명나라의 형법을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문을 쉽게 읽기 위하여 사용하던 이두를 이용하여 우리나라의 사정에 맞게 번안한 책이다. 그런데 사실 『대명률직해』라는 책의 이름은 조선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당시로 돌아가서 『대명률』과 관련된 책명을 보면, 『대명률』, 『대명률서(大明律書)』,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대명률부례(大明律附例)』 등이 존재하였지만, 『대명률직해』라는 명칭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대명률직해』라는 명칭을 사용했을까?

서적의 명칭으로 『대명률직해』를 처음 사용한 때는 조선총독부에서 전통적인 법전들을 교정하고 활자화하여 간행한 일제강점기로 보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견해다. 이렇게 일제 강점기에 『대명률직해』를 간행한 이후에는 이두가 들어가 있는 『대명률』을 모두 『대명률직해』라는 명칭으로 통칭하였고, 서적 이름으로도 사용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이 책을 영인하여 출간할 때에도 『대명률직해』라는 명칭으로 하였다. 이 책에서도 기존의 용례에 따라서 『대명률직해』라고 한다.

중국 명나라의 형법인 『대명률』은 어떻게 조선의 형법이 되었을까?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형법인 『대명률(大明律)』을 자국의 형법으로 사용하는 이른바 포괄적인 계수(법의 전파)가 일어났다. 『대명률』을 쓴다고 명확하게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하였는바, 이로써 조선 사회는 중국의 형법인 『대명률』을 포괄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조선의 경우 성종 16년(1485)부터 현재 전하는 『경국대전』의 최종본을 반포하여 시행함으로써 조선의 기본 제도가 완성되었다. 이러한 『경국대전』의 반포에 즈음하여 『대명률직해』의 조선 사회에의 계수가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조선 사회의 형사 기본법이 된 『대명률직해』는 구한말까지 사용되었고, 현대식으로 조문 번호를 매긴 최초의 근대적 형법으로 일컬어지는 『형법대전(刑法大全)』의 근간을 이루었다.

『대명률』은 그 당시까지의 역대 중국의 형법전들을 모두 참조하여 만든 것이었고, 내용도 매우 상세하였다. 따라서 고려 말 형사 사법을 개혁하려고 한 지식인들은 이를 도입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대명률』은 사소하게는 관직명에서부터 크게는 신분구조까지 우리의 사정과는 맞지 않는 면이 많았다. 이에 『대명률』을 우리의 사정에 맞게 내용을 고치고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여야 했는데, 그 작업은 역시 이두를 이용하는 길이었다. 이두는 문장구조가 다른 한문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마법의 도구였다.

조선시대의 죄형법정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은 어느 정도였을까?

서양 근대의 산물인 죄형법정주의는 『대명률직해』에서는 인정되지 않았지만 관리의 자의적인 형벌을 배제하기 위한 측면에서의 법정주의는 『대명률직해』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예컨대 처벌을 위해서는 반드시 처벌하고자 하는 행위에 적용되는 규정을 인용해야 했다. 관리의 자의적인 형벌을 배제하는 차원의 법조문의 인용은 한편으로는 국왕 내지 황제가 가진 처벌의 권한을 관리에게 위임한 것이므로 국왕 내지 황제가 언제든지 이를 살펴볼 수 있도록 근거를 남기는 역할도 한 것으로 보인다.

죄형법정주의의 전제가 되는 것은 형법에 규정이 없다면 사람을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는 무죄추정을 근간으로 한다. 그런데 전통사회에서는 이러한 무죄추정이 작동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혐의가 있는 것으로 수사가 개시되면 아무런 혐의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는 한 일단 유죄가 추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대명률직해』에 정확하게 해당되는 규정은 없지만, 사회에 위해를 가하는 등 처벌해야 한다는 집단적인 관념을 고려할 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다만 처벌의 자의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러한 유추 적용을 하는 경우는 반드시 국왕의 승인을 거치도록 하였다. 이처럼 서구 근대의 산물인 죄형법정주의는 그 전제를 달리하는 『대명률직해』에서는 인정되지 않았다.

『대명률직해』의 특징

『대명률직해』 총목에 나오는 각 편과 각 권의 조문수를 통하여 전통사회에서 중요하게 취급하던 사안들이 무엇인가를 추정할 수 있다. 형사처벌의 일반 원리를 다루는 명례율을 제외하고 각각의 범죄에 대하여 다루는 이율, 호율, 예율, 병률, 형률, 공률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형률로서 170개조에 이른다. 직무 분장에 따라서 범죄를 분류해 놓기는 하였지만, 인간사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재산범죄, 인명범죄, 성범죄, 폭력범죄 등으로, 형률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이에 비하여 가장 적은 분량을 차지하는 편은 건축, 토목 등과 관련된 공률이다.

한편 『대명률직해』는 신분에 따른 형량의 차이가 반영된 형법이다. 양인과 천인의 싸움이 일어났을 때 양인에 비하여 천인에게는 형량을 가중하였다. 또한 일반민과 관인 사이의 분쟁에서도 관에 대한 범죄로 보아 형량을 가중하였다. 연좌제도 역시 허용하고 있었다. 업무상 연좌(連坐)든 연좌(緣坐)든 모든 연좌가 허용되었다. 예컨대 부적임자를 추천하는 경우에는 추천한 자를 처벌하도록 하였고, 동료 관리가 죄를 지은 경우 직급에 따라 책임을 달리하기는 하였지만 모두 책임을 지는 것으로 하였다. 또 모반이나 모대역(종묘와 산릉 및 궁궐을 훼손하려고 꾀하는 것)을 하는 경우에는 본인만을 처벌하지 않고 일정한 범위의 친족도 연좌하여 처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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