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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강의실에 서기 위해
다시 강의실에 서기 위해
  • 양진오 경주대
  • 승인 2004.05.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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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

 

양진오(경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올해는 더 그랬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어디론가 잠적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물리칠 수 없었는데, 이 충동이 올해는 더 강렬하기만 했다. 오월의 신록이 내려앉은 교정의 작은 광장에서 제자들이 마련해준 파티도 그랬지만 부족한 용돈 자기들끼리 십시일반으로 모아 준비한 선물을 받을 때는 낯을 들 수 없었다.

 

정말 어디로 확 도망가 버리고 싶었다. 스승의 날을 기리는 제자들의 정성은 감격스러운 것이었으나 초대받은 젊은 스승은 좌불안석의 심정일 수밖에 없었다. 

 
스승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인격이 내게 있는지 의심 되거니와 정말 이렇게 스승의 날이라 해서 공개적으로 축하도 받고 선물을 받아도 되는 건지 영 쑥스럽기만 하다. 이렇게 마음에 그늘이 내리게 된 이유가 있다. 

올해 졸업생들과 통화할 일이 있었다. 그들의 근황이 궁금했었다. 이런 저런 안부를 묻고자 한 통화였는데, 괜히 연락을 한 게 아닌가 싶어 후회막급이었다. 졸업생들 대개가 마땅한 직장이 없는 상태였고, 있다 해도 아르바이트 수준이었다.

 

그 답답한 처지를 본인들로부터 들으려하니 영 죽을 맛이었다. 그래서였다. 올해 스승의 날이 그 어느 해의 스승의 날보다 고역으로 다가온 건 백수대열에 합류한 졸업생들과 통화를 하고 나서였다. 가슴 한 복판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앉아 있는 참담한 기분이었다.

취업이란 문제를 주체적으로 풀어야 할 당사자는 물론 스승은 아니다. 당연히 그 문제의 당사자들인 학생들이다. 그렇다고 스승된 자가 이 문제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4년이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어온 관계가 아닌가. 그렇다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스승된 자들은 그들의 제자들에게 취업을 포함해 인생의 길을 지혜롭게 개척해야 방법을 안내해야 하고 제자들로 하여금 그 방법을 성숙되게 고민하게 할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더 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스승된 자로서 감수해야 하는 책임의 이행여부도 고민거리지만 비실용적 학문으로 내몰리는 전공 강의가 더 큰 고민으로 다가온다. 학부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석사, 박사 학위과정에서 나는 여러 스승들로부터 인문학의 가치와 인문학자의 보람에 대해 교육받았다.

 

어렵사리 학위를 받고 더 어렵사리 대학교수가 되어 강의실에 와서 보니 그 인문학은 위기 혹은 푸대접, 비실용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응달진 구석에 처박혀 있는 모습이었다.

당황스러웠다. 학부와 대학원 과정에서 배운 그대로 학생들에게 강의할 수 없었다. 인간의 내면과 무의식마저 자본주의의 논리에 포획된 오늘날, 인문학은 그 전의를 상실하고 저자거리에 헤매는 유랑자 같은 꼴이었다.

 

내가 속한 문예창작학과는 기본적으로 인문학적 사유를 중시하는 과였기에 이렇게 초라하게 변모된 인문학의 위상 앞에서 전공 강의를 어떤 관점, 어떤 전략으로 설계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수세에 몰린 채 강의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지금 당장 강의실에서 물러날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 강의실을 자기의 구체적 실존을 적극적으로 투사할 현장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전공 강의에 관한 처절한 반성과 새로운 강의 내용을 지속적으로 설계해야 한다고 본다. 이 반성과 설계가 결국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인문학의 재활성화다.

진정, 인문학의 재활성화가 필요한 시점 같다. 그 활성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의 변동과 성격 그리고 대학으로 진입하는 새로운 세대들의 욕구를 면밀하게 살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고 믿는다.

 

백수 제자들이 그들의 재능과 끼를 펼칠 생활 현장으로 합류할 날이 오리라 믿으며 인문학이 재활성화되어 그 가치를 새로이 인정받을 날이 오리라 믿는다. 이 믿음을 현실적인 성과로 만들어내는 현장은 강의실이 아닐까 한다. 다시 강의실에 서기 위해 할 일이 한 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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