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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와 개방이 교차한 ‘실험실’의 진화
폐쇄와 개방이 교차한 ‘실험실’의 진화
  • 정민기
  • 승인 2021.01.08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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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의 진화 | 홍성욱 지음 | 박한나 그림 | 김영사 | 260쪽

연금술사 실험실은 철저히 폐쇄적
공개 실험은 연구의 검증 과정

 

이 책에는 연금술을 진지하게 연구했던 아이작 뉴턴의 옥스퍼드 실험실부터 과학자와 시민이 함께 진행하는 리빙랩(living lab)까지, 약 4세기에 달하는 실험실의 역사가 담겨 있다. 실험실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한가지 반복되는 패턴이 보인다. 바로 폐쇄적인 실험실과 개방적인 실험실이 번갈아 등장한다는 것이다. 

최초의 실험실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연금술사들의 부엌이었다. 이곳은 폐쇄적이었다. 값싼 금속을 정련해 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연금술은 신비주의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상징적인 표현과 비밀 기호들이 많이 등장한다. 만약 연구에 성공해 납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현자의 돌’을 찾아내면 큰 부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연금술사들은 연구결과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부엌 입구에는 항상 자물쇠가 걸려있었고 외부인의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됐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폐쇄적인 연금술사들의 연구전통을 비판했다. 베이컨은 실험과 관찰을 통한 ‘경험’의 수집이 지식의 원천이며 귀납법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연금술사들이 지식 축적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험을 통해 수집한 경험을 공유해야 더 나은 귀납적 진리에 이를 수 있는데 연금술사들의 비밀연구가 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명인사들의 살롱같은 실험실

로버트 보일(1627~1691)은 베이컨의 철학을 이어받은 영국의 화학자다. 그는 기체의 압력과 부피의 반비례 관계인 ‘보일의 법칙’을 발견하고 근대적인 원소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유명한 학자들과 박사, 의사, 신사, 숙녀들을 자신의 화학 실험실에 초대해서 직접 실험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보일은 연금술사들과는 달리 실험실을 적극적으로 개방했다.

보일이 공개적으로 실험을 시연한 이유는 과학 지식의 발전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험 결과의 신빙성 확보 때문이기도 했다. 보일이 살던 시절에는 사진술도 없었고 실험 결과의 조작 여부를 검증해줄 과학 공동체도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따라서 보일은 당대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실험을 직접 보여주고 그들의 이름과 반응을 논문에 상세하게 적어 자신의 논문이 거짓으로 작성한 것이 아님을 보이려고 했다. 보일은 실험을 지켜보던 한 여성이 진공관 속에서 새가 죽어가는 것을 불쌍히 여겨 실험을 중단해달라고 애원한 내용까지 써넣을 정도로 논문을 상세히 썼다. 이는 암호와 기호로 가득한 연금술사들의 연구일지와는 상반된 태도였다.

보일 이후 과학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다시 폐쇄적으로 바뀌었다. 실험이 정교해지고 복잡해지면서 고가의 실험장비가 사용될 뿐만 아니라 폭발이나 바이러스 유출 등의 안전사고가 발생할 위험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 과학은 같은 학과 연구자라 할지라도 세부 전공이 다르면 실험 결과를 전혀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전문화됐기 때문에 보일이 그랬던 것처럼 일반인을 증인으로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민과 함께 하는 리빙랩

폐쇄적으로 바뀐 실험실은 최근 들어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도시와 촌락의 여러 문제를 시민과 함께 연구해서 해결하는 ‘리빙랩’이 바로 그것이다. 리빙랩은 삶의 터전과 실험실이 하이브리드 공간을 만들어서 일상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해결한다. 이는 단순한 실험 ‘관람’의 개방이 아니라 실험 ‘참여’의 개방이기에 보일의 실험실보다 더 열려있다.

이 책에는 내용의 이해를 돕는 삽화가 실려있다. 홍 교수의 학부 수업을 들은 박한나 학생이 직접 그린 삽화다. 홍 교수가 책을 집필하다가 필요한 그림을 요청하기도 하고, 반대로 박한나 학생이 책에 들어갈 내용에 대해 논평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협업은 홍 교수가 책에서 말한 ‘바람직한 실험실’의 모습과 닮았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 그래서인지 이 책은 읽기가 편하고 창의적인 생각이 가득하다.

정민기 기자 bonsens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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